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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벤트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34년전 걸프전 직후였습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선보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데, 왜 이 나라는 이런 쇼를 34년간 하지 않았을까요?"
미국 육군 창설 250주년을 맞아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몰 주변에서 열린 열병식을 지켜본 로버트(58)씨는 열병식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로버트 씨의 말을 들으면서 '아차, 간과했구나' 싶었던 것은 정파를 초월한 미국인들의 군에 대한 애정과 보편적 존중의 정서였다.
록음악을 배경으로 미군의 주력 전차인 에이브럼스 탱크와 스트라이커 장갑차 등이 지나갈 때 현장의 수많은 미국 시민은 박수를 보냈고, 장병들은 손을 흔들었다. 북한의 열병식과 같은 '장중함' 또는 '절도'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시민들과 군인들이 호흡하는 축제의 분위기였다.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임을 보여주는 붉은 색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의 선거 구호) 모자를 쓴 시민들도 종종 눈에 띄었지만 일부였다.
제복을 입은 군인, 아들이 열병식에 참석하는 것을 보러 왔다는 중년 아저씨, 어린 자녀를 목마 태운 아버지 등이 내셔널몰의 잔디밭에서 제각각 방식으로 열병식을 즐겼다.
54세 여성 메건 씨는 트럼프 대통령 생일에 개최된 열병식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 질문에 "나는 육군의 250번째 생일을 기념하려고 온 것이지 트럼프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다"며 "나는 군용기와 헬기 등 우리의 군사장비들과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행사다"라고 말했다.
60세 남성 팻 씨는 "우리는 우리의 미국 군대를 지지해야 한다"며 "이 행사는 일반 국민들과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들의 사기를 고양시킨다"고 말했다.
물론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20세 대학생 캐롤린 씨는 "관심이 있어서 오긴 했는데 마침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과 겹친 이 행사는 근본적으로 한쪽 편을 위한 '일방적인' 기념식 같다"고 말했다.
참관 장소 입구의 검문 초소로 가는 길에 반트럼프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시위대도 있었다.
동시에 이날 행사에서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생일을 맞이한 트럼프 대통령이 부각된 측면이 있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무대에 오르자 일부 관객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 행사 때 단골로 초청되는 컨트리 가수 리 그린우드가 열병식 후 행사에서 '갓 블레스 더 유에스에이'(God Bless the USA·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부르면서 "대통령님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멘트를 했다.
J.D. 밴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 앞서 발언하면서 이날이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결혼기념일이라고 말하며 행사에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구설에 올랐다.
결국 이 행사에는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생일과 겹친 국가적 기념일에 논란이 일 수밖에 없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권력을 강화·과시하려 한다는 비판적 시선이 제기되는 동시에, 대중의 정서를 포착하는 '트럼프 정치'의 일면을 생각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렁에 빠져 수천 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동안에도 민주당은 물론 보수정당인 공화당조차 군의 사기를 높이는 특별한 행사를 개최하지 않았던 터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회로 삼아 미군과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실리도 도모한 셈이었다.
즉, 기성 정치인들이 알면서도 간과했던 기층 미국인들의 정서를 읽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포인트로 연결하는 그의 감각은 트럼프 대통령이 숱한 정책의 난맥상 속에서도 고정 지지층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 아닐까 했다.
이런 가운데, 이날 열병식을 앞두고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 등에서는 '반(反)트럼프' 시위도 열렸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열병식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은 "엄중한 무력"에 직면할 것이라며 강경 진압을 경고한 가운데, 전국적으로 개최된 '노 킹스'(No Kings·왕은 없다) 시위 주최측은 워싱턴 시위는 기획하지 않았지만 노 킹스 시위와는 별도로 집회가 열린 것이다.
백악관이 보이는 라파예트 광장에 모인 수백명의 참가자들은 "트럼프는 지금 물러나야 한다"(Trump must go now)는 구호를 외쳤다.
일부는 "트럼프의 파시스트 열병식에 '노'라고 말하자", "국가비상사태는 백악관에서 벌어지고 있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었다.
마이크를 잡은 엘살바도르 출신의 한 이민자는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 뿐이다"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에 항의하기도 했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벤(20)씨는 참가 취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헌법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왔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헌법과 적법 절차를 위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열병식 당일 시위에 강한 무력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위헌적이며 헌법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합성한 만화 이미지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나온 한 남성은 "열병식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그(트럼프 대통령)는 '김정은'이 되길 원하는 것 같아서 들고나왔다"고 소개했다.
jhcho@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