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멀리 거구의 사나이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왼 다리에는 보조기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날씨가 꽤 추운데 잘 지냈어"라며 인사를 건냈다. 그러더니 "이놈의 다리 때문에 난 술도 못 먹고 아주 감질맛이 나 죽겠어"라며 웃었다. 1m96의 거구에 환한 너털 웃음, 박기원 남자배구대표팀 감독이었다. 올해 남자배구대표팀을 이끌고 최상의 결과를 내놓은 박 감독을 만났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5월 말 홈에서 열린 숙적 일본과의 월드리그 C조 2연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초반 단독 선두에 나섰다. 하지만 이내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부상이었다. 주포 문성민(현대캐피탈)이 일본과의 1주차 1차전 도중 왼무릎 십자인대를 다쳤다. 캐나다와의 3주차 경기에서는 박철우가 무릎에 물이 차는 증세로 대표팀에서 아웃됐다. 주포의 부상과 함께 대표팀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초반 2연승 후 6연패에 빠지며 꼴찌까지 내려앉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2014년 월드리그 잔류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월드리그 C조에서는 1위가 결선에 나서고, 2위와 3위는 다음 시즌 잔류한다. 4위와 5위는 강등된 뒤 승강 플레이오프를 펼쳐야만 한다. 한국으로서는 포르투갈과의 월드리그 5주차 2경기에서 2연승을 해야 했다.
박 감독의 회상은 9월 일본 아이치현 고마키에서 열린 2014년 폴란드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 아시아지역 예선으로 넘어갔다.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9월 8일 나란히 2승을 달리고 있던 한국과 일본이 만났다. 세계대회 티켓이 걸려있었다. 때마침 일본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날 아침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다. 고마키체육관 곳곳에 올림픽 개최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저녁 황금 시간대 공중파 방송 중계까지 편성됐다. 한국을 상대로 승리해 축제 분위기를 이어가겠다는 계산이었다. 박 감독과 선수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박 감독은 "그 때 경기 시작 전에 꼭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춧가루는 한국산이 최고 아닌가"라며 웃었다. 3대0의 완승이었다. 8년만의 세계선수권대회 진출이었다. 고마키체육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한국 선수들은 서로 끌어안으며 환호했다. 박 감독도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마음껏 표현했다. 박 감독은 "한국 배구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한판이었다.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박 감독은 이 대회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지휘 도중 넘어지며 왼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결승전에서는 휠체어 지휘 투혼을 보였다. 왼 다리의 보조기는 영광의 상처였다.
2014년 목표는 인천 AG 금메달
이제 박 감독의 눈은 내년 9월 열리는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향해 있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일정이 세계선수권대회와 겹친다. 세계선수권대회는 9월 3일 시작해 9월 21일 끝난다. 아시안게임은 9월 19일 시작한다. 폴란드에서 경기를 치르고 돌아오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표팀을 이원화하기도 힘들다. 국제배구연맹(FIVB) 규정상 지역 예선에서 뛰었던 선수 엔트리의 일정 수준 이상이 포함되어야 한다. 박 감독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박 감독은 "세계선수권대회보다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더 중요하다. 대한배구협회와 함께 여러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떤 방법이든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