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번도 1등이었던 적은 없어요."
사람들이 흔히 믿는 것들이 있다. '배구선수는 키가 커야 한다?' 그 상식 같은 일반화를 멋지게 뒤집은 1m75의 전설이 자신의 30년 배구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백업 신세에서 '넘버원' 리베로가 되기까지 남들보다 두배로 흘려야 했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빵과 우유, 그리고 키 작은 꼬마 이야기
빵과 우유의 유혹으로 발을 들여놓은 배구. 여오현은 레프트 공격수로 포지션을 잡았다. 하지만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다. 여오현은 "초등학교 때도 키가 작았다. 1m40 정도였다. 전위에 들어가도 블로킹이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좌절을 불렀다. 혹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여오현은 "주위에서 유도, 역도, 레슬링 등 키와 상관없는 운동을 권했다. 실제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배구가 하고 싶었다"며 웃었다.
스트레스도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무등배에 나갔다. 서브 멤버체인지로 코트에 들어가는데, 하필 나와 교체된 선수가 우리 팀에서 가장 큰 선수였다. 그 모습이 사진으로 찍혔는데 '최장신과 최단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그때는 '나도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는 거였다"고 말했다.
|
키 작은 백업 레프트. 그는 늘 비주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레프트 공격수로 뛴 것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전부다. 그 외에는 서브 멤버체인지와 수비만 했다. 청소년 대표팀도 늘 다른 선수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늘 코트에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지 않았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묵묵히 훈련에 매진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배구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대학교 2학년 당시인 1998년. 배구에 수비전문선수 제도가 도입됐다. 여오현은 "대학교 때 운명의 제도가 생겼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며 "감독님께서 해보라고 하셔서 포지션을 옮겼다. 다행히도 자리를 잘 잡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포지션 변경은 신이 내린 기회였다. 여오현은 리베로 유니폼을 입은 뒤 펄펄 날았다. 삼성화재의 부름을 받아 실업 무대에 데뷔했고, 생애 첫 국가대표를 달기도 했다. 물론 화려한 영광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삼성화재에 입단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 대선배들 사이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내가 못하면 팀에 피해가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새벽 훈련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때 배웠던 '앉았다 일어나기' 같은 기본 훈련부터 다시 했다."
|
한국 나이로 어느덧 마흔. 여오현은 "아직도 마흔이 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벌써 29년 5개월이나 배구를 했다"고 본인 스스로 깜짝 놀랐다. 웬만한 선수 같으면 은퇴를 했거나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다. 하지만 여오현은 여전히 '핵심 멤버'다. 오히려 현대캐피탈에서는 현역연장, 45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여오현은 "45세까지 현역으로 뛴 사례가 거의 없다.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한데 팀에서 신경을 많이 써준다. 감독님께서도 '일단 해보자'고 말씀 하셨다. 내가 좋은 선례를 만들면 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캐피탈은 여오현을 위해 특별 식단과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그는 "나는 단 한 번도 1등이었던 적은 없다. 지금도 코트에 들어서면 무섭다. 하지만 실업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경기에 나섰다. 17년 동안 큰 부상 없이, 쉬지 않고 경기장에 있었다는 것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이런 내 모습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고 싶다. 팀에서 필요로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겠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백업 선수에서 대체 불가선수로 우뚝 선 여오현, 그의 배구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김가을 기자 epi1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