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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브 베테랑]'단신백업→월드리베로' 여오현의 기적과 45프로젝트

김가을 기자

기사입력 2017-04-23 21:10


여오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가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7.04.17.

여오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가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7.04.17.

"한 번도 1등이었던 적은 없어요."

'월드 리베로' 여오현(39·현대캐피탈)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작은 충격이었다. V리그 통산 최다 우승(8회), 리시브 6500개 1호, 디그 4000개 1호 등 각종 기록을 쓸어 담은 '진행형 전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혹시 지나친 겸손, 혹은 이미지 관리용 멘트가 아닐까.

"나는 멤버 체인지용 선수였다. 내가 이렇게 프로 선수로 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흔히 믿는 것들이 있다. '배구선수는 키가 커야 한다?' 그 상식 같은 일반화를 멋지게 뒤집은 1m75의 전설이 자신의 30년 배구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백업 신세에서 '넘버원' 리베로가 되기까지 남들보다 두배로 흘려야 했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빵과 우유, 그리고 키 작은 꼬마 이야기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에 배구부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은 '운동 소년' 여오현은 별 다른 고민 없이 배구부에 등록했다. '배구'라는 단어가 운명처럼 끌린 것일까. 그는 "뭔가 엄청난 게 있어 보이지만, 사실 별 것 없었다. 그저 단순히 빵과 우유를 준다고 해서 등록한 것이다. 친구들이랑 운동도 하고 빵과 우유도 먹고, 거기에 학원을 안 가도 됐다. 당연히 배구부 한다고 말했다"며 허허 웃었다.

빵과 우유의 유혹으로 발을 들여놓은 배구. 여오현은 레프트 공격수로 포지션을 잡았다. 하지만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다. 여오현은 "초등학교 때도 키가 작았다. 1m40 정도였다. 전위에 들어가도 블로킹이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좌절을 불렀다. 혹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여오현은 "주위에서 유도, 역도, 레슬링 등 키와 상관없는 운동을 권했다. 실제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배구가 하고 싶었다"며 웃었다.


스트레스도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무등배에 나갔다. 서브 멤버체인지로 코트에 들어가는데, 하필 나와 교체된 선수가 우리 팀에서 가장 큰 선수였다. 그 모습이 사진으로 찍혔는데 '최장신과 최단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그때는 '나도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는 거였다"고 말했다.


홍익대 시절의 여오현. 스포츠조선 DB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키 작은 백업 레프트. 그는 늘 비주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레프트 공격수로 뛴 것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전부다. 그 외에는 서브 멤버체인지와 수비만 했다. 청소년 대표팀도 늘 다른 선수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늘 코트에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지 않았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묵묵히 훈련에 매진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배구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대학교 2학년 당시인 1998년. 배구에 수비전문선수 제도가 도입됐다. 여오현은 "대학교 때 운명의 제도가 생겼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며 "감독님께서 해보라고 하셔서 포지션을 옮겼다. 다행히도 자리를 잘 잡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포지션 변경은 신이 내린 기회였다. 여오현은 리베로 유니폼을 입은 뒤 펄펄 날았다. 삼성화재의 부름을 받아 실업 무대에 데뷔했고, 생애 첫 국가대표를 달기도 했다. 물론 화려한 영광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삼성화재에 입단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 대선배들 사이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내가 못하면 팀에 피해가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새벽 훈련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때 배웠던 '앉았다 일어나기' 같은 기본 훈련부터 다시 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몸을 날려 수비하는 여오현. 정재근 기자
▶'현역 연장' 45세 프로젝트 돌입

한국 나이로 어느덧 마흔. 여오현은 "아직도 마흔이 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벌써 29년 5개월이나 배구를 했다"고 본인 스스로 깜짝 놀랐다. 웬만한 선수 같으면 은퇴를 했거나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다. 하지만 여오현은 여전히 '핵심 멤버'다. 오히려 현대캐피탈에서는 현역연장, 45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여오현은 "45세까지 현역으로 뛴 사례가 거의 없다.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한데 팀에서 신경을 많이 써준다. 감독님께서도 '일단 해보자'고 말씀 하셨다. 내가 좋은 선례를 만들면 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캐피탈은 여오현을 위해 특별 식단과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그는 "나는 단 한 번도 1등이었던 적은 없다. 지금도 코트에 들어서면 무섭다. 하지만 실업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경기에 나섰다. 17년 동안 큰 부상 없이, 쉬지 않고 경기장에 있었다는 것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이런 내 모습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고 싶다. 팀에서 필요로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겠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백업 선수에서 대체 불가선수로 우뚝 선 여오현, 그의 배구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김가을 기자 epi17@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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