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열린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게임은 지울 수 없는 악몽이다.
한국 축구는 4개월 전 벌어진 미국월드컵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무1패를 기록,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결과보다는 내용에서 더 큰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0-2로 끌려가다 경기 종료 직전 동점에 성공했다. 독일과의 최종전에선 전반을 0-3으로 뒤졌지만 후반 일방적인 경기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2대3으로 패했다. 난공불락의 무대로 여겨진 월드컵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월드컵의 최정예 멤버가 출격한 한국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호적수는 개최국 일본뿐이었다. 하지만 한-일전은 일찌감치 성사됐다. 8강전에서 만났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명승부였다. 일본→한국→한국→일본이 차례로 골망을 흔들며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을 펼쳤다. 희비는 후반 44분 가려졌다. '승리의 여신'은 한국을 선택했다. 황선홍이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짜릿한 3대2 역전승을 일궈냈다.
선수단의 분위기는 하늘을 찔렀다. 두려운 상대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가혹했다. 4강전 상대는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슈팅수 27대4, 한국이 경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우즈베키스탄이 1대0으로 승리했다. 한국이 슈팅한 볼은 마치 자석이 달린 듯 상대에게 착착 걸렸고, 우즈벡은 천운이 따랐다. 미드필더 중앙에서 때린 평범한 중거리 슈팅이 한국의 골키퍼 다리 사이로 빠지며 결승골로 연결됐다. 금메달 꿈이 날아간 한국은 3-4위전에서도 쿠웨이트에 1대2로 패하며 자멸했다.
토너먼트 대회의 단면이자 불확실성이다. 결코 간과해서도, 할 수도 없는 거울이다. 8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신태용호가 카타르 도하에서 1차 관문을 통과했다. 2승1무, C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조별리그는 21일(이하 한국시각) 모두 막을 내렸다. 한국의 8강 상대는 D조 2위 요르단으로 결정됐다.
드디어 진검승부가 시작된다. 8강전부터는 토너먼트 대회의 '꽃'인 단판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패하면 짐을 싸야하는 벼랑 끝 행보를 이어가야 한다. 자만은 있을 수 없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옮겨야 한다. 가야할 길은 정해져 있다. 8월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3위 안에 들어가야 한다. 4강행은 기본이고, 만에 하나 결승 진출에 실패할 경우 3-4위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만 곳곳에서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자칫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리우행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21년 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불확실성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해서는 신태용호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울리 슈틸리케 A대표팀 감독은 "공격을 잘하면 경기에 승리하지만 수비를 잘하면 우승을 한다"고 했다. 시사하는 바가 큰 금언이다. 공격도 중요하지만 견고한 수비라인 구축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일 이라크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허용한 경기 종료 직전 실점은 8강전부터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사소한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지는 순간 올림픽 출전 꿈도 좌절될 수 있다.
신태용호는 그동안 수비에서 적잖은 허점을 노출했다. 선수 개개인의 실수도 있었고, 수비 진영에서 수적 우세를 누리지 못하고 지역 방어에 실패하는 장면도 있었다. 상대의 역습에도 간간이 누수가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지나친 긴장은 독이다. 자신감을 잃어버려서도 안된다. 그러나 치명적인 오류는 최소화해야 한다. 수비 지역에선 모험보다는 안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우리가 조별리그에서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8강부터 다 보여줘야 한다. 이제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이겨야 한다. 매경기가 결승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조별리그가 막을 내린 후 신태용 감독이 던진 말이다. 그 약속을 꼭 지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게임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2팀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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