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의 등번호는 그라운드에서 두번째 이름이다. 외국인 선수의 경우 번호로 기억하는 경우가 있고, 몇몇 팀은 유니폼에 선수 이름을 쓰지 않고 번호만 단다. 번호만 봐도 누군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36번 하면 이승엽을 떠올리고, 롯데 자이언츠 10번 하면 이대호가 연결된다.
새 번호로 2018 시즌을 시작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원래 달았던 번호가 자신이 좋아했던 번호가 아니라 기회가 돼서 새 번호를 찾은 선수도 있고, 부진과 부상으로 좋지 않은 시즌을 보내 새로운 기분으로 출발하기 위해 바꾸기도 한다. 자기에게 맞는 번호를 찾기 위해 점집을 가는 이도 있을 정도로 등번호는 선수에게 중요하다.
KIA 타이거즈에서 등번호를 바꾼 선수 중 투수 윤석민이 눈길을 끈다. 웃자란 어깨 뼈를 깎는 수술을 한 뒤 1년 간 재활을 해 온 윤석민은 올시즌 복귀를 꿈꾸고 있다. 부활의 의지를 새 등번호에 담았다. 윤석민이 선택한 번호는 24번이다. 2005년 입단했을 때 20번을 달았고, 2011년부터 미국 진출 때까지 21번을 단 윤석민은 2015년 복귀했을 때 다시 20번을 골랐다. 국가대표팀에선 28번을 사용해 지난 2011년에 잠시 28번을 등에 붙이기도 했다. 24번은 낯설다. 야탑고 시절에는 27번이었다. 24번을 달았던 유재신이 14번으로 바꾸자 단숨에 낚아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는 번호였다. 윤석민 가족이 모두 생일이 24일이라고 한다. 윤석민은 7월 24일 생이고, 2016년 12월에 태어난 아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 태어났다. 아내 김수현씨도 24일에 태어났다. 24라는 숫자에 자신과 아내, 아들이 모두 들어있는 것.
팀을 옮겨서도 자신의 번호를 단 선수도 있다. kt 위즈의 더스틴 니퍼트는 두산 베어스 시절 쓰던 40번을 그대로 가져왔다. 한국에서 좋은 기억을 남겨준 번호라 애정이 있다. kt로 온 황재균도 10번을 선택했다. 황재균은 롯데 시절 13번이었는데, 2016년 10번으로 바꿨다. 10번은 이대호가 해외 진출 전까지 롯데에서 달았던 번호였다. 황재균은 아버지가 자주 다니는 절에서 추천한 10번으로 바꿔 달고 그해 타율 3할3푼5리, 27홈런, 113타점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를 찍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가장 잘했을 때의 번호인 10번을 선택한 것이다. 넥센 히어로즈 박병호도 자신이 써왔던 52번을 그대로 달았다. 구단은 박병호의 복귀를 기다리며 52번을 비워뒀고, 박병호는 명예회복을 위해 52번을 선택했다. 롯데에서 삼성으로 옮긴 강민호도 47번을 그대로 쓴다. 원 주인인 최민구가 군입대를 해 다행히 비어있었다.
성적이 좋은데도 번호를 바꾸는 특이한 경우도 있다. 넥센의 '바람의 손자' 이정후는 신인왕을 함께한 번호 41번을 버리고 51번으로 바꿨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즈키 이치로의 등번호를 예전부터 달고 싶었다고 한다. 51번을 쓰던 양 훈이 방출되면서 51번의 소유자가 됐다. NC 다이노스 박민우는 2번을 내려놓고 1번으로 갈아탔다. 김준완이 군대를 가면서 1번이 비자 박민우가 손을 들었다. 박민우는 2번을 달고서 좋은 성적을 냈지만 부상이 잦았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등번호에 변화를 줬다.
베테랑 선수임에도 굳이 자신이 원하는 번호를 고집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와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김현수는 새 번호로 22번을 선택했다. 그는 두산 시절 50번을 썼다. LG에서도 50번을 달 것으로 예상됐지만 특정 번호를 선택하지 않고 남은 번호 중 가장 마음에 든 22번을 골랐다. LG에서 방출돼 고향팀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 정성훈도 오랫동안 달았던 16번을 버렸다. 2003년 KIA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팀을 옮기며 16번을 달기 시작한 정성훈은 2009년 FA로 LG로 둥지를 바꾸며 59번으로 바꾼적이 있다. 2011년부터는 16번을 받아 계속 썼다. 그런데 KIA엔 김주찬이 16번을 쓰고 있다. 정성훈은 남는 번호 중 56번을 골랐다.
잘했을 때의 번호로 돌아간 경우도 있다. KIA로 이적한 후 4번을 달았던 서동욱은 이번에 고등학교 때 쓰던 번호로 바꿨다. 새 번호는 17번. 경기고 시절에 달았던 추억의 배번이다. 서동욱은 KIA에 입단했을 때 6번을 달았고, 이후 LG에서 3번, 넥센에 26번이 박힌 유니폼을 입었다. 2016년에 17번으로 바꿨는데 공교롭게도 KIA로 트레이드가 됐다. KIA에서는 남은 번호가 없어 4번을 달았다. 17번을 쓰던 한기주가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서동욱이 17번을 차지하게 됐다. 한기주의 트레이드 상대로 KIA에 온 이영욱의 등번호는 67번이다. 삼성시절 좋은 기억이 많았던 번호다. 군입대 전까지 67번을 달고 팀 우승에도 기여했던 이영욱은 2014년 복귀해 다시 67번을 찾았는데,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2015년과 2016년 9번을 달았고, 지난해엔 24번으로 바꿨으나 부진은 이어졌고, KIA에서 다시 67번으로 돌아왔다.
코칭스태프가 선수시절 번호를 갖는 특이한 경우도 생겼다. 한화 이글스 한용덕 신임 감독과 장종훈 수석코치, 송진우 투수코치가 현역시절 번호인 40번, 35번, 21번을 유니폼에 붙인 것. 특히 35번과 21번은 영구결번된 번호라 주인이 쓰는 것인데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여러 이유로 번호를 바꾼 이들의 올해 성적은 어떨까. 몇 명이나 자신의 '인생 번호'를 만날까. 권인하 기자 indy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