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싸늘해진 시선. '추락한 매스스타트 간판' 김보름(25·강원도청)은 큰절로 사죄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전까지만 해도 김보름은 대회를 빛낼 '스타'로 기대를 모았다. 실력은 기본, 화려한 금발에 매력적인 외모를 갖췄다. 평창올림픽을 통해 첫 정식 도입된 매스스타트는 그의 주종목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 종목 중 가장 나중에 치러지는 매스스타트. 김보름은 대회의 마침표를 화려하게 찍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우선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보름은 평창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2017~2018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4차 대회에서 다소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 허리 통증으로 2차 대회엔 나서지도 못했다. 다행히 평창행 티켓은 손에 넣었지만, 그의 컨디션엔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그렇게 나선 올림픽. 뜻하지 않은 돌발 상황이 생겼다. 지난 19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펼쳐졌던 여자 팀추월이었다. 김보름은 박지우(20·한체대) 노선영(29·콜핑)과 함께 준준결선에 나섰다. 기록은 3분03초76. 수치상으론 나쁘지 않았다. 한국 여자 팀추월이 올림픽에서 거둔 최고 기록이다. 종전 기록은 2014년 소치올림 준준결선에서 작성된 3분05초28. 당시 김보름 노선영이 양신영과 함께 나섰다.
그러나 경기 직후 논란이 불거졌다. 우선 주행이 문제로 지적됐다. 주자 간 격차가 컸다. 김보름 박지우는 앞서 들어왔다. 둘의 기록만 놓고 보면 2분59초대. 그리고 4초 뒤 노선영이 들어왔다. 엄청난 차이다. 팀추월은 3명이 함께 달려 마지막 주자의 골인 시점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때문에 서로 끌어주고 밀어줘야 하는 종목. 김보름 박지우가 뒤로 처진 노선영을 외면했다는 여론의 반응이었다. 여기에 경기 후 김보름 박지우의 인터뷰 태도가 부적절했다는 목소리까지 더해지며 논란은 심화됐다. 팀워크 논란에 '노선영 왕따설'까지 흘러나왔다. 이미 대회 개막 전 노선영의 '특혜 훈련 폭로'로 대표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팀추월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20일 김보름은 백철기 스피드스케이팅 감독과 기자회견에 나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국민 악녀'가 됐다. 김보름과 백 감독의 해명에 대한 반박을 노선영이 특정 매체를 통해 밝히면서 김보름은 더 궁지에 몰렸다. 폭로, 반박과 재반박.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명확한 사실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21일 폴란드와의 팀추월 7~8위 결정전.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노선영의 선수 소개 땐 함성이 쏟아졌다. 김보름 차례엔 싸늘한 침묵만 흘렀다. 당시 김보름의 대표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서명 국민 수는 60만명에 육박했다.
김보름은 진지하게 매스스타트 불출전을 고민했다. 코칭스태프에겐 자신의 불출전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동시에 심리치료도 병행했다. 흔들렸지만 올림픽 메달 꿈까지 버릴 순 없었다. 마음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런데 매스스타트 경기를 하루 앞둔 23일, 노선영은 자신이 출전하지 않는 매스스타트 훈련에 모습을 드러내 믹스트존 인터뷰를 했다. 그는 "올림픽이 끝난 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것"이라고 했다. 여론의 화살은 또 김보름을 향했다.
결전의 24일. 여자 매스스타트 준결선 출발선에 선 김보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냉랭하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따뜻했다. 관중들이 환호로 김보름을 맞이했다. 김보름은 입술을 꽉 문채 빙판을 응시했다. 준결선에서 6위로 결선에 올랐다. 영리한 경기 운영이 돋보였다. 관중석에선 "김보름! 김보름!"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결선. 차분히 기회를 노리던 김보름은 막판 질주로 2위에 올랐다. 7000명의 관중의 목소리는 하나. "김보름!"이었다. 레이스를 마친 김보름은 관중 앞에 섰다. 무릎을 꿇었다. 차디찬 빙판에 뜨거운 이마를 맞댔다. 큰절.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논란을 환호로 바꾼 김보름의 '은빛 질주.' 그 마침표는 뜨거운 큰절이었다. 첫 올림픽 매스스타트 메달리스트 등극의 환희에도 김보름은 말을 아꼈다.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이 한마디만 되풀이했다.
강릉=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