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 듯 순탄하기만 했다면, 우승의 감격은 덜했을 것이다.
서울 SK 나이츠가 창단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SK는 18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원주 DB 프로미와의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80대77로 승리하며 시리즈 4승2패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 2차전 연속 패배에 3차전 한 때 20점을 밀리던 SK였다. 사실상 포기의 순간이 왔지만, 3차전 연장 역전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바꿨고 기적의 4연승을 거뒀다. 챔피언결정전 뿐 아니었다. SK의 이번 시즌은 정규리그부터 가시밭길이었다. 그걸 다 극복해냈다. 우승의 자격이 있었다.
▶간판 김선형의 부상
문경은 감독의 눈에서는 거의 눈물이 글썽였다. 리그 개막하자마자 김선형이 다쳤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발목을 다쳤는데, 부상이 문제가 아니라 선수 생활을 접을 가능성도 있다는 큰 부상이었다.
김선형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속공으로만 해주는 득점이 경기당 8~10점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리딩의 효과도 사라지게 됐다. SK는 팀의 리더를 잃는 정신적 충격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이 없으면 잇몸이었다. 리딩과 슈팅이 좋은 정재홍과 수비에서 파이팅이 넘치는 최원혁이 그 공백을 잘 메워줬다. 장신 라인업이 필요할 때는 최준용이 포인트가드 역할을 대신해줬다. 김선형이 빠진 후 최준용이 가드로 뛰며 SK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가드 포지션 미스매치 효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그렇게 급할 것 없이 차분히 몸을 만들고 복귀한 김선형이다. 정규리그 성적에 쫓겨 무리했다면 플레이오프에서 제 경기력을 발휘 못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 맞춰 복귀한 김선형은 확실히 큰 경기에 꼭 필요한 선수라는 걸 입증했다. 문 감독은 1, 2차전 김선형을 무리하게 써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간파하고, 이후 승부처인 경기 막판 힘을 몰아쓰게 했다. 김선형의 클러치 능력이 빛나는 순간이 많았다.
▶헤인즈와 메이스의 운명같은 만남
문 감독은 재계약을 앞둔 마지막 시즌, 어려운 한 수를 꺼내들었다. 애런 헤인즈. 헤인즈와 화려하게 비상했던 문 감독은 플레이오프 우승이 필요하다며 2015~2016 시즌을 앞두고그를 내쳤다. 정통 센터 데이비드 사이먼과 함께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
결국 문 감독의 농구를 가장 잘 이해하고, SK 포워드 농구와 잘 어울리는 헤인즈가 필요했다. 헤인즈를 데려오는 건 문 감독이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자존심만 세우고 있을 수 없었다. 김선형이 부상으로 이탈해도 SK가 잘 나갈 수 있었던 건 결국 헤인즈 덕분이었다. 득점, 리딩 등 가려운 부분들을 혼자 모두 긁어줬다.
그렇게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하며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헤인즈의 무릎 부상. 플레이오프를 뛸 수 없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SK엔 두 번째 비상이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보고 당시 데려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인 제임스 메이스를 영입했다. 한국 무대 경험도 있고, 내-외곽 득점력이 좋아 SK에는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짧은 기간 손발을 맞춰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챔피언결정전 1차전은 메이스가 공-수에서 구멍이 돼 상대에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메이스가 분발하기 시작했다. 골밑 공격 욕심을 버리고 외곽에서 플레이하자 DB가 수비에서 혼란스러워했고, SK 특유의 드롭존 수비에도 잘 녹아들었다. 5차전 메이스의 3점쇼로 SK가 시리즈 승기를 완벽히 가져왔다.
헤인즈가 끌고, 메이스가 민 우승이었다. 문 감독 입장에서는 재계약 시 어떤 선수를 선택해야 할 지 행복한 고민을 해야할 수도 있다.
▶신인 안영준 선택은 신의 한 수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유독 좋은 신인이 많았다. 허 훈(KT) 양홍석(KT) 유현준(KCC) 등 1, 2, 3순위를 차지한 선수들에 비해 안영준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SK도 4순위를 뽑고 실망스러워했다. 문 감독이 같은 학교 후배를 챙겼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문 감독은 이전부터 안영준을 꼼꼼히 체크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과 농구 스타일부터, 대학 생활을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까지 말이다. 그리고 문 감독은 확신을 얻었다. SK의 장신 포워드 농구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선수임을 말이다.
허 훈과 양홍석에 비해 화려함에서는 밀렸다. 하지만 SK에서 수비, 리바운드, 속공을 도맡았다. 팀을 위해 희생하는 플레이가 많았다. 결국, 이런 희생 정신이 신인왕에 오르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4강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에서 신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활약을 했다. 정규리그 평균 7.10득점을 하던 선수가 4강 플레이오프 평균 12.25득점, 챔피언결정전 5차전까지 평균 8.60득점을 기록했다. 마지막 6차전도 초반 10득점하며 승기를 가져다줬다. 출전시간도 30분 가까이로 늘었다. 허슬플레이는 그대로인데, 고비 때마다 3점포와 속공 득점까지 성공시켜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왜 신인왕인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다.
잠실학생=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