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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의 꿈★" 스키에 미친 동호인X국대,'기선전'이 증명한 스포츠 상생의 길[현장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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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강원도 용평리조트 올림픽 코스에서 펼쳐진 제36회 전국스키기술선수권 결승전, 게이트(제한활강) 종목 첫 순서부터 슬로프가 발칵 뒤집혔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KSIA)이 매년 주최하는 전국스키기술선수권은 데몬스트레이터(이하 데몬), 레벨3(정지도자), 레벨2(준지도자) 등 대한민국 대표 스키어들이 겨우내 갈고 닦은 기량을 치열하게 다퉈 명실상부 현존 최강의 스키어를 선발하는 대회. 스키어들은 통상 '기선전'이라 부른다.

첫 주자로 나선 최성호 데몬이 물 흐르듯 유려한 활강으로 34초83을 찍었다. 비선수 출신 최 데몬이 내로라하는 국대 선수들을 줄줄이 제치고 예선 상위 20명의 선수 중 3위에 올랐다. 게이트는 슬로프 위 기문 통과 기록으로 순위를 가리는 소위 '레이싱 종목'이다. 숱한 알파인스키 경기 경험을 통해 속도 경쟁에 익숙한 '선수 출신'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종목. 비선수 출신들에겐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종목이었던 게이트에서 국대 출신들을 줄줄이 따돌린 비선수 출신의 반란에 현장에선 "와, 미쳤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스키에 미친 동호인들의 무한도전

기선전은 스키에 미친 동호인들의 로망이자, 매년 최고의 스키어를 가리는 '좁은 문'이다. 기선전 예선에서 평균 90점 이상을 받으면 '국내 최고 레벨 지도자' 레벨3 실기 검정을 통과한다. 실기 패스가 끝이 아니다. 실제 교습과정을 시연하는 '티칭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레벨3 '정지도자' 자격이 부여된다. 매년 500~600명이 나서는 기선전 예선에선 남자 100위, 여자 20위까지 결승에 오른다. 결승전은 기록 종목 '게이트', 기술 심사 종목 '숏턴' 두 종목. 결승서 남자 50위, 여자 12위에 들면 '스키 지도의 끝판왕' 데몬 선발전 참가자격이 부여된다. 한해 선발되는 '레벨3' 지도자는 10~20명선이다. '데몬'에는 남자 24명, 여자 6명 등 총 30명이 선발돼 1년간 활동한다.

첫 출전한 기선전 예선에서 떨어졌다는 구평우씨는 "올 겨울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어요. 리프트 패스 찍힌 횟수를 보니 1006회던데요"라고 했다. 동국대 법대 졸업반이라는 구씨의 꿈은 변호사. "대학 와서 스키를 시작했는데, 취미에 너무 깊게 빠져들어 기선전까지 나서게 됐다"는 설명이다. "레벨3는 '진짜 완전 잘 타는 경지', '데몬'은 동호회 같은 데선 얼굴도 볼 수 없는 분들"이라고 정의했다. '취미를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라는 우문에 그는 반문했다. "취미니까 이렇게 하지 않을까요?"

기선전 결승 14위에 오른 1996년생 서리라씨는 지난해 경희대 체대를 졸업했다. 스무 살 때 수업시간에서 접한 스키에 빠졌다. 6년만에 '레벨3급' 실력자가 됐다. 지난 여름 뉴질랜드 전지훈련을 다녀온 후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더 열심히 해서 데몬까지 되고 싶다"며 눈을 빛냈다. 레벨3 도전 이유를 묻자 "경쟁을 즐기는 것 같다. 대회에 나와 내 순위도 알고, 레벨이 올라가면 스키강사로서 인정도 받고, 레벨을 올려가는 배움의 과정이 재미있다"고 했다. "유튜브와 SNS, 온라인 동호회엔 기술, 장비 정보가 넘쳐난다. 제가 가르친 동호인 분 대부분은 스키를 대여하지 않고 구입한다. 대부분 40만원대지만 200만원대 선수용을 구입하는 분들도 꽤 있다. 장비업체들이 마케팅도 많이 해서 100만원대 할인정보도 종종 공유한다"고 귀띔했다. 서씨는 기선전 결승 직후 이어진 레벨3 티칭테스트에서 국대 출신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다. "선수 출신이든 비선수 출신이든 우린 다 같은 지도자 아니냐"며 웃었다.

1999년부터 스키를 탔다는 '동호인' 배용구 짐스포츠 대표는 레벨3 티칭테스트에 재도전했다. "2년전 실기는 통과했는데, 티칭테스트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아이아빠가 된 후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대회에 나오는 것이 즐겁고,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이제 딸과 함께 안전하고 재미있게 가족스키를 타는 것이 또다른 목표"라며 웃었다. 배 대표는 "비선수 출신 최성호 데몬"을 언급했다. "'선출(선수 출신)'이 아닌데도 선수에 가깝게 타신다. 비결은 노력과 구력인 것같다"고 했다.

1986년 삿포로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출신 박재혁 KSIA회장은 "현재 우리 연맹 소속 레벨 1,2,3 자격을 가진 지도자 중 30%가 선수 출신, 70%가 비선수, 동호인 출신"이라면서 "이들 대부분은 스키장에서 3~4개월 이상 살며 훈련하는, 스키에 푹 빠진 마니아들"이라고 설명했다. "잘 타는 동호인은 선수 이상으로 잘 탄다. 스키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기선전'에 한 번 나오는 것, 기선전에 입상해 '데몬 선발전'에 나가는 것이 일생일대의 로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선전 1위 김하영-주사랑 데몬 "동호인 레벨 많이 올라왔다"

이날 기선전이 열린 결승 슬로프는 3년전 평창동계올림픽 무대인 용평스키장 올림픽 코스, 기문 사이를 활강하는 엘리트-동호인 선수 뒤로 오륜마크가 선명했다. 평창선수단장 출신 김지용 KSIA 명예회장은 "잘 타는 동호인들이 정말 많아졌다"며 흐뭇해 했다. "세계 어느 슬로프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최고의 코스, 올림픽 코스에서 동호인 최고의 선수들이 경연하는 건 뜻깊다"고 했다. "연맹의 지도자 레벨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검증된 지도자들이 매년 배출되고, 스키 장비도 타기 편하게 개발되면서 실력파 동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선전 남녀 챔피언 김하영 데몬과 주사랑 데몬 역시 '미친' 동호인들의 약진을 인정했다. 김 데몬은 "SNS나 웹사이트를 통해 동호인들의 관심을 체감한다. 슬로프에서 질문하시는 분들도 많다. 동호인 레벨이 정말 많이 올라왔다"고 했다. 주 데몬은 "요즘 잘 타는 동호인들이 정말 많다. 기록 종목인 게이트 종목은 차이가 컸는데 오늘 남자부를 보니 비선수 출신들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더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남녀 1위' 데몬들은 이구동성, 동호인들의 발전에 반색했다. "우리만 잘 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모든 스키어의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스키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초심과 나눔' 국대들의 무한도전

이날 기선전에서 각각 3위, 12위에 오른 국대 출신 이현지와 고운소리는 레벨3 티칭 테스트에 동호인들과 함께 응시했다. 이현지는 알파인 국가대표, 고운소리는 평창패럴림픽 때 '시각장애인 국대' 양재림의 가이드러너였다. 알파인 국대 출신들이 동호인들과 함께, 동호인을 위한 기술 중심 인터스키 '레벨3'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현지는 "8세 때부터 2019년 3월까지 선수로 뛰면서 오직 경쟁만 했다. 알파인 국대의 자부심도 컸다. 하지만 여긴 완전 다른 세상이더라. 스키 기술이 이렇게 많고, 배울 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강사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한 자기계발이자 도전"이라고 답했다. "선수 때 우리는 스탠다드 숏턴, 스탠다드 패러렐 같은 용어도 몰랐다. '11자, A자, 바깥발 눌러! 겁먹지마! 더 재껴!'만 알았다. 우린 초심자로 배우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고운소리 역시 "늘 지도만 받다가 이 종목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가르치게 됐다. 이런 지식들을 선수 때 갖고 있었다면 훨씬 더 잘했을 것 같다"고 돌아봤다. "레벨3 도전에 있어 동호인과 우리는 동등하다. 실기, 게이트 종목에만 좀 더 강할 뿐 티칭테스트는 얼마나 스키를 잘 이해하느냐,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내공을 쌓았는지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대 출신들 역시 새 도전에 '미쳐' 있었다. "이곳엔 너무 많은 지식과 배움이 있다. 우리도 열심히 배우고 기꺼이 나누고 싶다."

▶'취미에 진심인 편' 포스트 코로나 시대, 스포츠에 기회

'취미에 진심'인 동호인 스키어들과 '배움에 진심'인 엘리트 스키어들이 한 슬로프에서 공존하고 경쟁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돈보다 행복이 중요한 시대, 취미 활동에 엘리트 선수 못지 않은, 뜨거운 열정을 쏟고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좋아서 궁극의 레벨까지 무한도전을 즐기는 스키 동호인들의 예는 스포츠가 가야할, 상생의 새 길을 보여준다.

이문진 KSIA 검정위원장(서울교대 체육연구소 연구교수)은 동호인들의 레벨 검정, 도전 열기에 대해 "동호인 스키는 승패나 스코어가 있는 종목이 아니다. '레벨2, 3'나 '데몬'은 자신의 실력과 존재를 증명하고 공인받는 수단"이라고 진단했다. 소위 '레크리에이션의 전문화' '진지한 여가'라는 말로 동호인들의 거침없는 도전 열기를 설명했다. 직업 선택에 있어 적성이나 만족도보다 현실적 안정성을 추구하고, 일을 통한 자기만족이나 자아실현이 힘든 세대들은 취미, 여가활동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이를 통해 자기 만족과 성취감, 궁극의 행복을 찾는다는 얘기다. '진지한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전문가 그 이상의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다.

'스포츠'라는 취미에 미친, '선수인듯 선수 아닌' 이 자발적 동호인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체육의 힘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폭발적으로 증가할, 스포츠 수요에 맞춰 새 길을 준비할 때다. 선수와 비선수,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상생은 이미 시작됐다. 새로운 체육의 100년, 한껏 높아진 동호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체계화된 시스템과 이들의 지갑을 기꺼이 열게할 다양한 플랫폼과 아이디어,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고민할 때다. 평창=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