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생 대한축구협회(KFA) '막내' 전임지도자 박윤정(32), 그녀의 이력서엔 지난 10년 분투의 흔적이 또렷하다.
1988~1990년생들이 주축인 여자축구 황금세대 틈바구니에서 U-18, 19 연령별 대표팀을 거쳤고 2008년 A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포항여자전자고-대구 영진전문대 졸업 직후 2010년 드래프트로 WK리그 서울시청, 2011년 구미 스포츠토토를 거쳐 2013년 일본 알비렉스 니가타에서 은퇴했다.
일본 경력만 뺀다면 또래 에이스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눈에 띄는 차이는 한 발 앞선 지도자 이력이다. 불과 스물두 살, WK리그 2년차 때인 2011년 3월 KFA C급 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2015년 B급 자격증, 2019년 A급 자격증까지 따낸 직후 바늘구멍 경쟁을 뚫고 압도적 실력으로 KFA 전임지도자에 발탁됐다. 여자축구 지도자 중 새 길을 여는 '뉴 프런티어'를 찾는다고 하자 현장 지도자들이 이구동성 박 코치를 천거했다. 김태엽 감독이 이끄는 U-15 여자축구 대표팀의 코치다.
16일 오후, 봄햇살이 쏟아지는 파주NFC에서 그녀를 만났다. U-13, U-14 여자축구 유망주를 위한 골든에이지 프로그램, 사진기자의 카메라 플래시에 꺄르르 V자를 그려대던 소녀들이 스스럼 없는 몸짓으로 "쌤, 쌤"하며 박 코치 곁을 파고들었다. 베테랑 감독 출신 전담지도자, 서효원 팀장과 송경섭 감독이 "박 선생, 화이팅!"을 외친다. "아, 부끄럽네요." 센터백다운 헌칠한 키에 서글서글 사람 좋은 눈웃음이 인상적이었다.
'골든에이지' 소녀들의 나이에 그녀도 축구를 시작했다. "2002년, 중학교 1학년 때 좀 늦게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까진 태권도를 했는데, 체육선생님이 권하셔서 축구를 하게 됐죠."
박 코치는 고 이성천 감독이 이끌던 포항여자전자고에 진학하며 축구에 제대로 눈 떴다. "원래 공격수였는데 고3 센터백 언니가 다치면서 중앙수비를 하게 됐어요. 난생 처음 우승도 하고, 제일 좋았던 시절"이라며 웃었다. 이 감독 아래 전성기를 맞으며 태극마크도 달았지만 실업행 후 그녀는 축구가 행복하지 않았다. "1년차때 정말 힘들었다. 나는 늘 그저 열심히 하는 선수였는데, 축구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녀에게 지도자의 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고등학교 때 지도자를 해야지 생각했었다. C급 지도자 연수를 받는데 너무 좋았다. 축구를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다. 갈증이 사라졌다. 어린 나이지만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더 어린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기 은퇴를 계획하고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큰 물로의 도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한번 마음 먹은 것은 끝내 해내는 편"이다. 2013년 일본 알비렉스 니가타행은 중학교 때부터 품어온 오랜 꿈이었다. "중학교 때 일본 시모노세키 팀과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그때 일본서 뛰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지인의 소개로 테스트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2013년 선수 은퇴 직후 건국대에 편입해 학사 학위를 받았고, 체육인재육성재단 영어 중급 코스에 등록했으며, 호주 케언즈로 1년 영어연수를 떠났다. 호주에선 U-12 클럽 주말반 아이들을 가르치며 코칭 경험도 쌓았다.
좋은 지도자 뒤엔 어김없이 좋은 지도자가 있다. 박 코치는 "나는 선생님 복이 있는 선수"라고 했다. 그의 스승, 고 이성천 감독은 20여 년간 포항 지역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2019년 만 51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이 감독은 박 코치가 힘든 순간마다 손을 잡아준 스승이었다. 여주대 여자축구부 코치로 일하다 팀이 해체되자 애제자를 모교로 불러들였다. 함께 포항여전고의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고 함께 최우수지도자상도 받았다. 이 감독의 별세 당시 곁을 지킨 박 코치는 스승 이야기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독님 아래서 가장 축구가 늘었고, 가장 재미있었고, 가장 많이 배웠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늘 용기를 주셨다. 나도 선수들이 언제든 마음을 열고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여주대 시절 감독으로 모셨던 최영근 인천 유나이티드 수석코치도 그녀의 오랜 스승이다. "리더십도 뛰어나시고 전술도 정말 좋으셨다. 공부를 정말 많이 하는 지도자셨다.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카쿠라 아사코 일본대표팀 감독처럼 우리도 조만간 '레전드' 여성 사령탑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박 코치는 "잘 준비된 좋은 선배님들이 정말 많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여자라서가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자격을 갖춰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도록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도자를 준비하는 여성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지도자를 준비한다면 적어도 심리학, 생리학 등 체육학의 기본은 알아야 한다. 협회에 공개된 자료만 미리 잘 챙겨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코치는 여자축구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현재 U-13, U-14 여자선수는 전국 14개 중학교, 120명뿐이다. 한국에서 축구를 하고 싶은 여학생들이 정말 120명뿐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축구를 할 공간과 팀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라면 여자아이들도 축구를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WK리그나 K리그 팀 산하에 유소녀 클럽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박 코치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세월이 흐른 후 '윤정쌤이랑 축구할 때 정말 좋았지, 참 재미있었지'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포항여전고 제자들이 와서 '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더라"며 활짝 웃었다. 행복축구, 얼핏 소박한 꿈같지만 가장 어려운 그 길을 목표 삼았다.
지난해 2월 KFA가 발표한 대한민국 여자축구 등록선수는 1524명에 불과하다. 3월, 3차례에 걸쳐 2박3일 일정으로 전국의 골든에이지 13~14세 선수들과 함께한 박 코치에게 여자축구의 희망을 물었다. "1-2차 총 74명의 선수중 A+급 선수가 20명도 넘는다"고 했다. "이 친구들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월드클래스, '지메시' 지소연(31·첼시위민)은 만 15세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래서 물었다. "이 어린 선수들 중 '지메시'를 뛰어넘을 선수가 나올까요?" 인터뷰 내내 나직나직, 담담한 대답을 이어가던 박 코치가 가장 큰소리로 자신 있게 답했다. "그럼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인터뷰 후 돌아가는 길, '박 코치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우리 어린 친구들, 좋은 기사 많이 내주세요. 저는 안나와도 괜찮아요." 수많은 현장의 축구인들이 왜 입을 모아 '박윤정'을 추천했는지 알 것같았다. 파주=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