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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배꽃의 시어" 홍경흠, 여섯 번째 시집 '배밭에는 배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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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몰입한 시적 열정…노년의 삶과 사랑,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

원로 시인 홍경흠(76)이 여섯 번째 시집 『배밭에는 배꽃이 핀다』(황금알)를 출간했다. 체육 교사로 40여 년간 교단에 섰던 그는 쉰이 넘어 문단에 등단한 뒤, 20여년간 뜨거운 열정으로 시를 써왔다.

첫 시집 『푸른 생각』이 미국 워싱턴대학에 소장되며 주목받은 그는, 『감정을 읽는 시간』(2019) 이후 6년 만에 이번 시집을 발표했다. 『배밭에는 배꽃이 핀다』에는 은퇴 이후 더욱 깊어져가는 삶의 성찰이 곳곳에서 보인다.

홍 시인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희대 체육학과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제7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특선, 에피포도문학상, 한국창작문학 작가상, 화천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국제펜클럽 저작권위원,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발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인의 언어, 생의 마지막 계절을 통찰하다

이번 시집은 노화, 죽음, 집, 사랑을 중심 주제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담아냈다. 병상에서 죽음을 마주하며 드리는 겸허한 기도, 무주택자로서의 삶에 대한 고백, 병마와 싸우는 아내를 향한 늦은 애틋함,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후회까지, 홍 시인은 직설적이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노년의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노래한다.

"공원에 가면 사람 냄새가 난다. 내게는 공원이 사랑이다."

'노인과 공원' 연작은 노년의 상실감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또, 표제작 「배밭에는 배꽃이 핀다」에서는 "나는 배꽃으로 살기로 했다"라며 생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배꽃에 빗댄다.

▶평론가의 시 세계 해설 ? "불꽃처럼 빛나는 사랑의 언어"

문학평론가 권온은 이번 시집을 "홍경흠 시 세계의 새로운 전환점"이라 평했다.

"홍경흠은 체육 교사로 평생을 살아온 뒤 늦은 나이에 시단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언어의 불꽃을 피워냈다. 이번 시집은 노화와 죽음, 결핍과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사랑이라는 불꽃으로 삶을 지탱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했듯, 사랑은 불꽃만큼 빛이어야 한다. 홍경흠의 시는 그 불꽃을 잃지 않은 시인의 증명이다."

평론가는 또한 「기도」와 「묏자리」, 「고물상」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과 노화에 대한 시인의 응시를 높이 평가하며 "초고령 사회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동시에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시로 만나는 홍경흠의 목소리

<기도>

병상 침대에서 몇 달째 웅크려 있다

오늘은 죽을까

내일은 살까



한겨울

눈이 두텁게 쌓인 산자락에

차디찬 백골로 눕기 싫었다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 앞에

두 손 모으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오늘만큼은 착한 성도가 된다



<배밭에는 배꽃이 핀다>



봄은 사방으로 자신의 색깔을 퍼 나른다

섭생 꽃이든 자생 꽃이든

바라보면 늘 새롭고 들여다보면 늘 신비롭다



배꽃도 암술이 있고 수술이 있다 배밭의 소란에 눈이 떠지고 귀가 열렸다

배꽃이 내지르는 향기에 취해있던 나는 배꽃이 되어간다

배꽃과 배꽃은 서로 배꽃인 줄 모른다

왜 배꽃이 배꽃을 그토록 사랑하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배꽃이 내 뒷모습을 껴안아 주던 날

내 마음속 흉터가 사라진 것만 생각했다

(중략)



그런 첫사랑과 늙음을 함께 하지만

어쩌다 서로 부딪칠 때면

난 배꽃밭의 환희를 생각하며 한발 물러선다



훨훨 날아다니는 꽃잎에 그날의 가슴이 뛰고 있다.



<초록별의 눈물>



초록별이 기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물을 펑펑 쏟는다



온실가스에 중독된 기후는 폭염 한파 태풍을 시도 때

도 없이 일으킨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행동은 벽시계 태엽과 같은 돌고

도는 습관이 있다



산호가 하얗게 죽어가고 숲이 불길에 사라지고 각종

질병이 창궐해도



어느 날 꽃들로 다시 핀다



먹구름이 악마처럼 험악한 얼굴로 번개와 함께 올지라도



고대 미생물과 좀비 바이러스가 깨어난 듯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방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며 내가 나를 기다리는 의미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어디선가 새들이 빛나는 자세로 날아간다



엄마가 산후조리를 하는 사이 밥솥이 김을 내뿜고 있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는 동안 그냥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