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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 민간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山神)' 또는 '산주(山主)'로 받아들여져 왔다. 두려움과 동시에 숭배의 대상인 셈이다. 하나의 산에 주인이나 신이 둘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한 산에 두 호랑이는 있을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한 지역에 두 명의 1인자가 공생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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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감독과 이 수석은 현역시절 각자 전문분야에서 '1인자'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들이다. 지난 2011년 6월말,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기획하고 팬과 야구인, 언론인의 투표로 선정된 '한국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이 발표됐다. 여기에서 선 감독은 투수로, 이 수석은 외야수(중견수)로 각각 '레전드'의 영예로운 칭호를 품에 안았다. 해당분야에서 만큼은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하나의 산(KIA)에 둥지를 튼 두 마리의 호랑이(감독출신 레전드 선동열과 이순철)'는 불안정해보였다.
하지만 이후 1년간, 두 '레전드'의 호흡은 더할나위 없이 순탄하게 이어졌다. 음과 양, 엄부와 자모, 채찍과 당근.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역할 분담을 시시때때로 적절히 나눠가며 현재의 팀에 과거 '명가 타이거즈'의 DNA를 이식하는 작업을 안정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비록 2012시즌 예기치 못한 주전들의 집단 부상 여파로 KIA가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선수단의 체질개선 측면에 있어서는 확연히 향상됐다는 평가는 바로 이들 두 레전드의 안정된 조화에서 나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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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몸을 낮춘 35년 지기의 속깊은 배려
불안해보이던 '레전드의 동거'는 어떻게 평탄한 항해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데에서 나왔다. 35년 지기의 우정과 서로의 전문성을 이해하는 포용력이었다. 여기에 스스로를 먼저 낮추는 성숙한 배려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레전드'는 35년 이상 서로 알고 지낸 친구사이다. 선 감독이 63년생이고, 이 수석이 61년생이지만 학번과 프로입단년도는 같다. 선 감독이 빠른 63년생이라 한 해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 이 수석은 고교시절 전남고에서 광주상고(현 광주 동성고)로 전학을 하면서 1년을 유급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학번과 프로입단 '동기'로 묶인 친구가 됐다. 대학시절은 피할 수 없는 사학 라이벌인 고대와 연대에 각각 입학하는 바람에 치열하게 그라운드에서 싸웠지만, 함께 85년 해태에 입단해서는 '타이거즈 왕조'라고 불리는 영광의 시기를 함께 만들어냈다.
선 감독은 "어떻게 보면 이 수석과는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라고 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가깝게 지내다보니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바로 그런 부분도 내가 이 수석을 모신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35년 지기라고는 해도 '감독-수석코치'의 상하관계에 묶이다보면 아무래도 서로 불편해지는 순간이 오게될 수도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서로를 인정하고 먼저 몸을 낮추는 포용력과 배려심이다. 두 레전드 모두 이에 관해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쾌한 해답을 내어놓는다. 선 감독은 "감독과 수석코치는 뭐랄까, 서로 둘도 없이 친밀해야 하는 관계다. 호흡이 잘 맞지 않으면 팀이 흔들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수석이 참 고마울 때가 많다. 프로감독을 경험하신 분이라 내 입장을 잘 헤아려 주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수석 역시 "선 감독께서 내게 많은 부분을 믿고 맡겨 주셔서 더 큰 책임감이 든다. 내가 할 일은 그런 감독님을 잘 보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 감독은 "지난해 선수들의 부상으로 힘든 시기가 많았다. 야구를 하다보면 그런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 이 수석이 곁에 계셔서 큰 힘이 되기도 했다. 투수 파트는 내 전문 분야지만, 타격이나 수비는 이 수석이 더 잘 아신다. 그래서 그에 관한 파트는 모두 이 수석에게 맡겼다"며 현재의 명확한 업무분담은 서로의 전문분야를 특화시킨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35년 친구지만 서로 존대를 한다. 선 감독은 과거 삼성 감독으로 재임했을 때 한대화 수석코치(2005~2009) 장태수 수석코치(2010) 등 야구 선배들을 수석코치로 곁에 뒀던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직급이 낮은 수석코치라도 늘 존대를 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이 수석에게도 마찬가지로 존대말을 한다. 이 수석 역시 감독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서로 먼저 몸을 낮추고 존대하면서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양복 선물에 담긴 선 감독의 고마움
지난 12월, 이 수석은 선 감독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 하나를 받았다. "이 수석님, 이거 받으세요."라며 선 감독이 건넨 것은 서울 중심가 고급 맞춤 양복점의 양복 티켓. 오로지 선 감독이 이 수석을 위해 개인적으로 마련한 선물이었다. 지난 연말에 이 양복점에서 선 감독이 준 티켓으로 옷을 맞춘 이 수석은 "감독님께 양복 티켓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환하게 웃었다. 고가의 양복 티켓보다도 그 안에 담긴 선 감독의 마음이 더 고마웠던 것이다.
선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티켓을 선물한 이유를 물었다. 선 감독은 멋쩍은 듯한 목소리로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이 수석께 달리 뭘 해드릴 건 없고. 그냥 내 마음의 표시였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요청에 따라 KIA 수석코치로 부임해 한 시즌 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뜻. 선 감독은 정말로 더 큰 선물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했다.
양복 티켓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한 선 감독은 "지난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이 수석과 함께 올해는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겠다. 마침 한대화 감독님도 2군 감독으로 오신 만큼, 한층 좋은 팀을 만들어가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선동열 감독과 이순철 수석코치, 그리고 한대화 2군 감독까지. 세 명의 '레전드'가 모인 KIA가 올해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지 기대된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