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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쓰고 있으니 내가 마치 박보검이 된 것 같네요."
지난 3일 서울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만난 캐나다인 닉(23) 씨는 갓을 쓴 채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평소 K-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닉씨는 "(갓이) 햇빛을 가려 줘서 덜 더운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화창한 날씨 속 경복궁과 인근 골목 일대에는 오전 9시께부터 한복을 빌려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갓을 쓴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닉씨는 '10년 전 박보검'을 언급했지만, 지금의 갓 인기는 확실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영향이다. 최근 '케데헌'이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가운데, 극중 아이돌 그룹 '사자 보이즈'가 착용한 갓이 외국인 팬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놀러왔다는 미국인 엘리야(18) 씨도 갓을 쓴 채 "'케데헌'을 재미있게 봤다"며 "갓은 가벼워서 좋다"라고 말했다.
또 대만에서 온 카일(32) 씨는 "갓은 아름다운 패션 아이템"이라며 "'케데헌'에서 봐서 친숙하게 느껴진다"며 웃었다.
경복궁 근정문 일대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던 일본인 테루(30) 씨는 "갓을 써도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다"며 만족스러워했다.
흥례문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던 스페인 관광객 월터(33) 씨 역시 "대여점에 있길래 써 봤는데 좋은 것 같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던 가이드가 경복궁의 역사를 설명하다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온 것"이라며 갓을 소개하는 모습도 보였다.
갓을 직접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다.
지난 7월 해외 틱톡 이용자 'xin***'이 "이제 당신도 이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기) 한국 갓으로 데몬 보이즈의 일원이 될 수 있다!"(Now you too can be part of a demon boy band with this DIY korean gat!) 문구와 함께 올린 영상에 따르면, 리넨 소재의 납작한 모자와 PVC 모자, 스타킹 등만 있으면 간단하게 갓을 제작할 수 있다.
납작한 모자 위에 두꺼운 PVC 시트를 둘러 원통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스타킹을 씌운다. 스타킹 다리 부분이 원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고, 안으로 들어간 스타킹 다리 부분을 비틀어 고정하면 된다.
해당 영상에는 "이거 진짜 좋아 보인다!"(This looks so good!)(이용자 'an***'), "세상에, 튜토리얼 정말 고마워요"(Omg thank you so much for the tutorial)('ryu***'), "베이스 모자 링크도 공유해 줄 수 있나요? 진짜 멋져요"(Can you share the link for the base hat? This looks so good)('car***') 등 영어 댓글이 이어졌다.
또다른 틱톡 이용자 'que***'도 갓을 손수 제작하는 영상을 올렸다. 반투명한 검은색 원단을 도넛 모양으로 자른 뒤 틀에 맞춰 재봉틀로 박음질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갓을 직접 만들었다.
유튜브 이용자 'Saa***' 역시 "갓을 만들어 보자"(Let's make Gat)며 반투명한 검은색 원단을 자르고 다림질하는 과정을 담아내며 직접 갓을 완성해 보였다.
이 영상에는 "모자는 어떤 소재로 만드셨나요?", "큰 링은 어디서 구하셨나요?" 등 세부 사항을 물어보는 영어 댓글이 달렸다.
그런가 하면 엑스(X·옛 트위터) 이용자 'Dea***'는 갓 사진을 공유하며 "이 모자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너무 갖고 싶다!"(I absolutely LOVE these hats and want them for myself so badly!)고 적었다.
박지종 대중문화평론가는 "좋아하는 문화를 자신의 생활 속에 녹여내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이 '케데헌'의 '사자 보이즈'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해외 누리꾼들은 "사자 보이즈 의상이 그를 떠올리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어"(Won't deny that the Saja Boys outfits reminded me of him)(이용자 'Fir***'), "가톨릭 교회조차 사자 보이즈에 홀렸네. 귀마(Gwi-ma)는 이제 잔치를 벌이게 생겼다"(Even the Catholic Church got seduced by Saja boys. Gwi-ma is about to have a feast)('bak***') 등의 댓글로 호응했다.
◇ 삼국시대 등장…"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모자"
갓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 고분 감신총의 벽화인 '착립기마인물도'에는 갓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도 '갓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갓은 원래 햇볕이나 비 등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 등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가 됐다.
구체적으로는 고려 말에 관모의 기능을 갖추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상투를 튼 머리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쓴 뒤 그 위에 갓을 얹어 착용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완벽하게 두르는 등 의관을 정성스레 갖췄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예법에 따라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귀히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으로 상투가 사라지고, 이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갓은 일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만 의례나 전통 공연, 드라마 등에서 한국적 이미지를 대표하는 복식 요소로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갓의 제작은 크게 세 단계의 분업화된 과정을 거친다.
김순영 전북대 의류학과 교수는 4일 "위로 솟은 '모자' 부분과 테두리인 '양태' 부분을 따로 만들고, 마지막에 둘을 합치는 세 개의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말총을 원통형으로 촘촘하게 엮는 기술이나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찢어 원반형으로 엮는 기술은 고도의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갓의 재료나 제작 방식 등이 한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성이 있다"며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모자인 것"이라고 짚었다.
◇ '전설의 고향' 이후 '갓 쓴 저승사자' 등장
'케데헌'의 '사자 보이즈'는 저승사자다. 검은 도포에 갓을 쓰고 다니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그간 숱한 한국 드라마에 유사한 방식으로 등장했다.
1977년부터 '전설의 고향'을 오랜 기간 연출한 최상식 PD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현대적 저승사자 이미지는 KBS 드라마 시리즈 '전설의 고향'을 계기로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최 PD는 2021년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전설의 고향' 이전에는 캐릭터화된 (저승사자) 이미지가 없었다"며 "죽음의 이미지는 새카만 색이니 까만 도포를 입히고, 까만색과 대비되게 얼굴을 하얗게 칠하자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모습은 전통 유물에서도 일정 부분 확인된다.
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가마인 '상여'를 장식한 꼭두 인형 가운데는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저승사자와 흡사한 형상이 있다.
꼭두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꼭두는 주로 19~20세기의 것이다. 다만 모든 꼭두가 검은 의상을 한 것은 아니다. 노란색이나 초록색, 혹은 점박이 무늬의 옷을 입은 꼭두도 존재한다.
◇ "춤추는 사자 보이즈, 한국 문화 매력 발산"
댄스 크루 '범접'의 공연도 '케데헌'과 비슷한 시기 갓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콘텐츠다.
지난 6월 18일 유튜브 '더 춤'(THE CHOOM) 채널에 올라온 범접의 퍼포먼스 '몽경(夢境)-꿈의 경계에서' 영상은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지난 5일 기준 조회수 1천600만 회를 넘어섰다.
영상 속 무대는 갓을 쓴 저승사자 콘셉트로 꾸며졌다. 댄서들은 황천길을 건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며 독창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튜브 이용자 'gha***'는 "한국 전통을 (그 모자들과) 상상력 넘치는 안무, 범접 특유의 움직임과 결합하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위한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Combining Korean tradition (with the hats) with imaginative choreography and the trademark Bumsup moves makes you think that this could be a powerful army for the K-Pop Demon Hunters)고 평가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갓은 머리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안이 보이는 독특한 구조로 기품과 격조를 동시에 보여 준다"며 "사자 보이즈가 갓과 도포를 입고 춤추는 장면은 한국 문화의 매력을 전 세계에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도 "사극에서 등장하는 갓을 현대화하고 힙하게 활용하는 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며 "젊은 세대의 SNS 활동을 참고해 갓 등 전통 의상의 트렌드화 작업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haemong@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