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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리우올림픽을 앞둔 7월이었다.
9월이 열렸다.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됐다. 20여일 전 다시 입원했다. 어떤 고난에도 꿋꿋하게 맞서 극복했던 터라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길이었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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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현역 시절 유공(1987~1995년)과 수원(1996~1997년)에서 266경기에 출전, 36골-21도움을 기록했다. 성실한 미드필더로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태극마크와 인연이 없었다. 국가대표 출신과 비 국가대표의 출발은 천양지차다. 보수적인 축구판에 '무명의 선수'가 지도자로 성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는 2000년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를 통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5세 이하(U-15), 20세 이하(U-20) 대표팀 수석코치를 거친 이 감독은 2007년 기회를 잡았다. 유소년 지도자 1세대로 쌓은 노하우를 인정 받았다. 2007년 17세 이하(U-15)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새로운 싸움이었다. 이 감독이 기댈 언덕은 '결과' 뿐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이력을 감안할 때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재기 불능'을 의미했다. 소신은 뚜렷했다. 거친 파도에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에게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가갔다.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정확하게 맥을 짚어가며 조련했다. 노력이 빛을 발했다. 2009년 FIFA U-17 월드컵 8강, 2011년 U-20 월드컵 16강, 2013년 U-20 월드컵 8강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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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의문부호가 달리지 않았다. 이 감독은 2016년 리우림픽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하지만 지난해 초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갑작스레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에서 하차했다. "2016년 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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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8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이 감독은 떠났다. 하지만 '이광종'이라는 이름 석자는 축구 역사에 남았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