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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A 아니면 B'의 이분법이 아니다. 스포츠 세상도 마찬가지다. '엘리트 체육 아니면 생활체육' '선수 아니면 학생' '인권 아니면 성적',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엘리트 체육의 뿌리가 생활체육이고, 생활체육의 열매가 엘리트 체육이다. 전 국민이 유년기부터 스포츠를 자유롭게 즐기는 가운데 뛰어난 체육영재들로 이뤄진 엘리트 선수들은 자신의 꿈과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Factfulness, 사실충실성)'에 따르면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의 '간극 본능'일 뿐이다.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영웅과 악당,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끊임없이 구분 짓지만 현실 세상은 '하늘과 땅'의 이분법이 아닌 '완만한 다양성'이다. 결국 차이란 수렴을 위한 차이이며 갈등은 합의를 위한 갈등이다. 2020년, 대한체육회는 100주년을 맞는다. 작금의 대한민국 체육의 위기는 새로운 100년을 준비할 천우신조의 기회다. 무엇보다 혁신의 방향은 선수와 사람, 스포츠 가치를 향해야 한다. 그 자체로 완전체인 스포츠를 통해 선수와 국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스포츠조선은 모두가 행복한 스포츠 세상을 위해 한국 체육이 가야할 길을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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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초 충격적인 조재범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성폭력 의혹 사건에 이어 체육계 미투 사건이 잇달아 불거졌다.
체육계 현장 지도자들은 열패감에 빠졌다. 열악한 환경속에 제자들을 위해 헌신해 온 현장 지도자, 뜻 있는 협회, 체육단체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다. "우리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지도자의 변화는 체육 혁신의 시작점이다. 지도자가 바뀌어야 선수가 바뀐다. 강압적인 도제식 훈련방식으로 성적만을 강요하던 시대가 지났다. '우리 땐 말이야' 방식은 21세기 선수들에게 안 통한다. 자기주도형 훈련, 합리적인 프로그램으로 행복한 선수를 키워내는 것은 결국 지도자의 몫이다. 대한민국 체육의 해법을 지도자 자격 제도 개선, 교육 시스템의 강화에서 찾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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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아카디아홀을 찾았다. 최태원 대한핸드볼협회장 직속 핸드볼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국제핸드볼연맹 국가대표팀 지도자 코스(IHF National Team Coach Course 2019)를 열었다. 일본, 중국,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10개국에서 온 25명의 감독들이 슈페테 기술위원장(독일), 타볼스키 집행위원(체코), 랜듀어 기술위원(프랑스)의 강의에 집중했다. 대한핸드볼협회 전임지도자 오성옥 청소년대표팀 감독의 모습도 보였다.
핸드볼 아카데미를 통한 지도자 교육 시스템 확립은 수영 국가대표 출신 최정석 대한핸드볼협회 이사와 안지환 운영본부장이 2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온 작업이다. 유럽핸드볼연맹의 체계화된 지도자 교육 시스템에 주목했다. 최 이사는 "유럽연맹 교육의 거점, 크로아티아 체육관에서 700명의 유럽 A급 코치들이 모여서 교육을 받는 모습을 봤다. 마침 한국 경기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룹별로 나뉘어 한국의 공격, 수비 시스템을 낱낱이 분석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최 이사는 지난해 5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유럽연맹 아카데미에서 한국 핸드볼 아카데미를 소개했다. 국제핸드볼연맹이 이 아카데미에 주목하면서 이번 지도자 코스 유치와 함께 아시아 지도자 교육본부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한국의 핸드볼 아카데미가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지도자 교육을 전담할 본부가 된다. 국제연맹 기술위원장 등 영향력 있는 강사진이 한국에 와 직접 강의를 한다. 공부하는 한국 지도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다. 최 이사는 "국제연맹은 향후 3~5년 안에 축구처럼 P급 지도자 자격증이 없는 경우 올림픽, 세계선수권에 못나가게 하는 제도를 시행할 방침이다. 교육에 대한 비전이 우리와 맞아떨어지면서 아시아 교육 거점 프로젝트가 성사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과 연계한 아시아 지도자 아카데미는 매년 2~3회 교육과 함께 핸드볼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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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교육과 함께 자격제도의 세분화 및 강화도 필요하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마린보이' 박태환과 동행했던 권세정 SK스포츠단 부장은 "미국, 일본, 호주 등 대부분의 수영 선진국의 경우 코치 자격 요건이 엄격하다"면서 "박태환과 선수생활을 함께했던 켄릭 몽크도 마이클 볼 감독의 클럽에서 어린이부터 가르치고 있더라"고 귀띔했다.
수영 선진국의 경우 '티칭(teaching)'과 '코칭(coaching)'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티칭'은 수영의 기본 기술을 가르치는 강습, '코칭'은 기본기를 마스터한 수영선수의 기량과 멘탈을 성장시키는 전문과정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스타플레이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 하더라도 시작은 '보조코치'다. 호주의 경우, 보조코치를 하면서 멘토로부터 코칭의 기본기를 익히고, 이후 메인 코치가 되기 위한 '초급(Development) 코치' 자격증을 취득한 후 '중급 (Advanced) 코치', '상급 (Performance) 코치' 자격증을 차례로 따야 한다. 안전교육, 베팅 및 승부조작 방지 교육 등 인성교육에 대한 코스도 필수다.
영국의 경우 지도자 교육을 전담하는 '수영 학교(Institute of swimming)'가 독립돼 있다. 지도자 자격은 보조코치, 코치, 시니어코치 3단계다.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이론 강의를 듣고, 현장에서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성인들을 차례로 가르치며 수영코치로서의 실습 시간도 쌓아야 한다. 코칭 코스, 세미나를 통해 최근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의 경우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가 되고 싶으면 전문 스포츠지도자 자격증 1급, 2급만 따면 된다. 이론 중심의 자격증으로 수영 선진국에 비해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 다른 아마추어 종목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축구의 경우 국제축구연맹(FIFA) 산하 전세계 국가들에 공통된 지도자 시스템이 존재한다. D급부터 C, B, A급, P급 라이선스의 체계가 있고, A매치나 클럽 대항전 벤치에 앉으려면 P급 지도자 자격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종목별로 제각각인 지도자 시스템의 체계화, 세분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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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제조기'로 회자되는 일부 지도자의 경우 도제 시스템 속에 원천기술을 '이너서클'끼리만 공유하고, 훈련시설과 정보를 독점한다. 정보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이다. 이중 일부는 절대 권력이 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금메달에 목숨을 건 선수와 학부모들이 줄을 늘어선다. 비정상적 갑을 관계는 폭력, 성폭력, 금품 비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세계를 손바닥 안에서 들여다보는 5G 시대, 행복한 스포츠 세상을 위해 훈련법과 코칭 철학의 공유와 나눔은 중요하다.
'우생순의 주인공' 오성옥 청소년대표팀 감독은 현재 핸드볼 아카데미에서 초중고 훈련의 표준화 모델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어느 학교, 어느 지도자나 '한국형 핸드볼'의 철학과 최신 전술, 과학적 훈련법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올림픽 5회 출전에 빛나는 '레전드' 오 감독은 "올림픽 등 큰 무대만 다니다 초중고 대회를 가보니 아쉬움이 많았다. 한국형 핸드볼을 잊은 것같았다"고 했다. 오 감독은 자신의 전술, 작전, 영상을 선후배들과 아낌없이 공유하고 있다.
초중고 훈련 표준화 프로그램에 대해 "전임지도자로서 이 일만큼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힘든 과제지만 우리 지도자들과 선수들을 위한 일이다. 이 모델이 완성되면 그 뿌듯함은 말로 다 못할 것같다"고 말했다.
이번 지도자 코스에서 생애 첫 영어 강의에도 도전한 오 감독은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번 교육을 통해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유럽생활도 했고, 감독으로서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고 생각했는데, 강의를 들으며 내 핸드볼이 구식처럼 느껴졌다. 내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독일 기술위원장의 강의를 통해 풀리지 않던 1대1 수비의 해법도 찾았다. 유럽은 이미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장점에 한국 핸드볼의 장점을 결합했다. 가만히 있어서는 이길 수 없다. 우리도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과 유럽의 핸드볼의 장점을 결합한 최고의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번 교육을 통해 다시 지도자로 태어난 기분이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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