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잘싸'…대한민국이 달라졌어요

기사입력 2016-08-22 18:09


 ◇이대훈 선수가 18일 오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에서 열린 2016리우올림픽 태권도 남자 68kg 이하급 8강전에서 요르단 아흐마드 아부가우시에게 8대11로 패한 뒤 박수를 쳐주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졌잘싸'.

'졌지만 잘 싸웠다'를 줄인 이 신조어는 22일(한국시간) 막내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관통한 키워드다. 현지에서 날아오는 열전의 소식은 폭염 속 대한민국을 더욱 뜨겁게 달궜지만, 결과에 대한 선수들과 국민 반응은 이전 어느 국제대회에서보다도 '쿨'한 모습을 보였다.

태권도 68㎏이하급 동메달리스트 이대훈은 8강전 패배 후에도 상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 화제가 됐다. 이대훈은 "어릴 때는 지면 슬퍼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상대를 존중해주고 싶다"면서 "이번 대회를 누구보다 즐겁게 준비했다"고 환하게 웃었다. 유도 66kg 이하급에서 통한의 한판패로 금메달을 놓친 세계랭킹 1위 안바울. 경기 직후 매트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울먹이던 그는 불과 10분 후 시상식에선 웃으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은 축제다. 즐기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기계체조 박민수는 개인종합 결승행 탈락 이후 SNS에 "저는 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을 준비한 저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가대표'입니다"라고 썼다. 모두 예전 같으면 아쉬움과 좌절감에 표정이 굳어졌거나 고개를 푹 숙였을 상황이었다.

스포츠팬도 대승적으로 변했다. 메달보다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아깝게 졌거나 경기 중 실수를 한 선수들을 격려하는 댓글이 관련 기사에 줄줄이 달리고 있다. '은메달이라 안타깝다'는 기사에는 '은메달도 대단하다, 자랑스럽다'는 반박 댓글이 이어진다. '기대주 줄줄이 예선탈락' 류의 기사에도 '잘했다', '괜찮다', '장하다'는 댓글이 대다수다. 아시아 선수 첫 올림픽 리듬체조 메달을 기대했던 손연재가 4위로 경기를 마감한 뒤 '그동안 고마웠다', '수고했다'는 격려가 줄을 이었다. 동메달을 놓치고 "죄송하다"는 털보 레슬러 류한수에게는 '최선 다했는데 왜 사과하나', '아름다운 4위'라는 위로가 이어졌다. 28년만에 '노메달'을 기록한 한국 탁구에 대해서도 정영식의 투지를 칭찬하는 댓글이 주를 이룬다. 이는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결과보다 과정', '비난보다 격려'라는 트렌드가 완전히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스포츠맨십'과 관전 문화 성숙의 밑바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 전체의 트렌드 변화가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김병준 인하대 체육교육과 교수(스포츠심리학)는 선수들의 당당한 변화에 대해 "그들이 자기주장과 감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어린 시절부터 문화적 다양성을 맛본 젊은 선수들은 상대 선수를 '적'이 아닌 '경쟁하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압적이던 훈련방식이 자기주도적으로 바뀌고, 코칭 방식이 질책보다 격려 위주로 변화한 것도 한몫 했다. 국제대회가 많아지면서 올림픽의 '유일무이'한 절대가치가 희석돼, '전투'보다 '즐기자'는 인식이 강해진 것도 이유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패배한 선수도 칭찬하는' 스포츠팬들의 변화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일반인이 국가대표 선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경기 결과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심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흥분하거나 패배한 선수를 비판하는 경향은 확실히 줄었다"면서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자신감과 여유가 생기면서 다양한 가치에 대해 성숙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한민국이 성장 지상주의의 깃발 아래 '헝그리 정신'을 앞세우고 일렬 종대로 달리던 단일 목표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를 중시하는 다원화된 사회로 진화한 것이 올림픽 응원 문화에 투영됐다는 설명이다.

한편으로는 '3포세대' '흙수저'로 상징되는 젊은 층의 좌절감이 '결과에 관대한 응원'에 일부분 반영됐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금메달에 집착하지 않는' 분위기가 올림픽 응원 문화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지면 자칫 '집단 무기력증'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있다. 이런 다각도의 해석을 아우르면, 2016년 한국 사회의 명과 암이 두루 반영돼 리우올림픽 '졌잘싸' 트렌드가 만들어진 것이며, 이런 트렌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인 것이다.


다시 리우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눈을 돌려 보면, 이번 올림픽에는 김연아처럼 전국민이 반드시 금메달을 따기를 바라는 '압도적 스타'가 없는 것도 관대해진 응원 트렌드의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곽금주 교수는 "이번 올림픽은 다양한 종목의 여러 선수에게 시선이 분산돼 있다"며 "김연아처럼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빅 스타는 국민의 기대를 못 맞추면 '거국적인 아쉬움'을 일으키지만, 리우 선수단에는 그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선수는 없어서 기대치가 낮아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효자 종목'들이 메달을 놓치면서 '금메달 10개'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언론이나 스포츠팬들은 메달보다 선수들의 스토리, 즉 도전하는 과정과 내용에 더 주목한다. 과거 '헝그리 정신' 시대의 영웅이 초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이었다면, 오늘 우리 사회의 영웅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옆집 청년인 것이다. 그 청년은 동시에 바로 자기자신이기도 하다. 관대하고 따뜻한 '졌잘싸' 응원이 '옆집 청년'인 국가대표 선수들, 또 그들의 이웃이기도 한 국민 모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다.
김소형기자 compact@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