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싱 한 세기를 찬찬히 반추해 보면 승과 패를 주고받으며 영욕으로 점철된 수많은 복서가 뇌리를 스쳐 간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국 복싱 현대사에서 지독한 불운에 울었던 복서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황충재다. 78년도 방콕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WBC 웰터급 1위, 동양 웰터급 챔피언으로 13차 방어에 성공한 철권이다. 그가 얼마 전 설운도 작곡의 '뻥이야'라는 곡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며칠 전 그를 만났다. 먼저 황충재는 "절대로 나를 미화해서 쓰지 마라. 상처받은 아픔도 인생의 한 부분이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학사(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출신 복서 황충재와 필자는 30년 인연이지만. 난로 같은 관계다. 가까이 있으면 뜨겁고, 멀리 있으면 추워지는 그런 관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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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재는 79년 4월 프레드 파스터(필리핀)를 상대로 프로에 데뷔한다. 하지만, 한국체대가 아닌 동국대 소속이었다. 왜 그랬을까? 황충재는 78년 한국체대에 입학할 당시 선배들이 기강을 잡기 위해 신입생들을 집합시키자 항명 소동을 벌인다. 그러자 선배들은 한발 물러나 아시안게임 끝나고 보자며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후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그는 당시 동국대 3학년 황철순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동국대 편입을 건의했고, 복싱계 마당발 황철순이 역량을 발휘하여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결국 동국대로 편입했던 것이다. 동국대 2학년 황충재는 프로 데뷔 후 7경기 만에 필리핀 원정 경기에서 챔피언 단디 구즈만을 판정으로 꺾고 동양챔피언에 등극한다. 구즈만은 한국의 이만덕을 6회 KO로 잡고 정상에 올랐지만, 안방에서 황충재에게 완패하며 벨트를 푼 것이다. 황충재는 이후 불과 21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동양 타이틀전을 치러 모두 성공했고, 그중 12차례는 KO승이었다. 유일한 판정승은 전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사엔삭 무앙수린과 태국 원정에서 치른 6차 방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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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날짜만 미정인 채 황충재에게 총 7억 원의 파이트머니를 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전호연 회장은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면서 한마디 던진다. "동양타이틀을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충재에게 그 어떤 경기도 치르게 해선 안 된다"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크게 시달린 황충재는 마음을 추스르며 서서히 워밍업을 시작한다. 한데 당시 황충재의 동양타이틀을 호시탐탐 노리던 인물이 있었다. 국내 웰터급 챔피언 황준석의 매니저인 동아의 김현치 회장이었다. 물론 황준석이 동양 랭킹 1위로 지명도전자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전호연 회장 사위인 극동의 김종수 사장과 동아의 김현치 회장이 사석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김현치 회장은 김종수 사장 면전에서 황충재를 폄훼하는 말을 쏟아내며 신경을 건드린다. 천하의 황충재에게 이제 갓 신인 티를 벗은 황준석을 비교하는 것 자체에서 이미 크게 기분 상한 김종수 사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시 황준석은 15전 전승(6KO승)을 기록하며 알찬 퀄리티를 지니고 국내 타이틀 3차 방어에 성공하고 있었고, WBC 웰터급 1위 황충재는 22전 전승(19KO승)에 동양 웰터급 챔피언으로 14차 방어를 앞둔 시점이었다. 김현치가 흥분한 김종수에게 "황충재가 정말 이긴다고 생각하면 우리 삼백만 원씩 걸고 내기합시다" 하고 유혹의 미끼를 던지는 순간 김종수가 그만 덜컥 물어버리면서 계약이 체결된다. 82년 4월 18일 전주대결은 그렇게 탄생한다. 황충재의 트레이너였던 임현호 씨는 필자와의 만남에서 "충재는 딱 보름 훈련하고 경기를 치렀다. 몸과 마음이 붕붕 떠 있는 상태에서 훈련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난 경기를 회고했다. 그러면 김현치는 왜 승산도 희박한 황준석과 황충재의 단두대 매치를 기획했을까. 김현치의 과거 행적을 알아보면 해답이 나온다. 라이트급으로 활동했던 아마추어 시절 김현치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1m70의 김현치는 68년 멕시코올림픽 대표이자 라이트급 지존인 이창길의 장신(1m77)에서 내리꽂는 스트레이트에 총 맞은 노루처럼 펑펑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김현치는 이창길과의 3차례 경기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참패를 당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학습효과를 체험했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리고 체득한 실전 노하우를 황준석에게 전수한다. 여기에 황충재의 방심도 커다란 일조를 했음은 물론이다. 황충재는 황준석의 주무기인 라이트훅을 경계하였지만, 첫 다운은 레프트훅이었다.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나온 것이다. 경기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전략과 전술을 세웠던 것이다. 한국 복싱 역사상 단 한 경기만으로 양 선수의 명암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린 임팩트 있는 승부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하지만 패자 황충재는 의연했다. "'패자지 무언'이다. 준석이는 참 좋은 선수다. 특히 순발력이 뛰어났다. 상대를 너무 낮게 평가하고 방심한 내 불찰이다"라고 필자에게 말할 땐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가 생각했던 답은 적어도 '준석이 정도의 풋내기는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눈 딱 감고 잽 하나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다'는 모범답안(?)이었던 것이다. 황충재는 여느 복서와는 다르게 승패에 담담했고, 초연했다. 그리고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복서 황충재의 진솔한 내면이다. 이런 황충재를 장정구는 '도인'이라고 필자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황충재와 연관된 황철순, 황준석이 모두 창원 황씨라는 점이다. 전 동양챔피언 황복수 역시 창원 황씨이고, 홍수환의 모친 황농선 여사도 창원 황씨라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현역 시절 황충재는 '봉천동 하리마우'라 불리는 건달 출신 복서가 체육관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자 체벌을 가하면서 군기를 잡은 일화는 유명하다. '복싱은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운동'이라는 황충재의 훈계에 안하무인이던 그도 고개를 숙였다. 한국 프로 복싱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진체육관 복싱 듀오 김사왕, 김태식과 허물없는 친구처럼 어울리던 시절 김태식의 실제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스럼없이 형님으로 대하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있던 페더급 강타자 김사왕과 생활할 때 다혈질인 그가 흉기를 들고 대들자 순간적으로 피하면서 한 방을 날려 깔끔하게 정리한 일화는 지금도 복싱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무용담이다. 김사왕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자 장례를 정성껏 치러줬던 일화는 황충재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그의 주변엔 장정구를 비롯하여 따르는 복싱 선후배들이 차고 넘친다. 연예계 쪽으로 발을 넓히면 송기윤, 이동준, 설운도, 김흥국, 전영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여형약제하는 가수 남진은 환갑 나이에 신인가수로 데뷔한 황충재에겐 더할 수 없는 응원군이자 든든한 조력자이다.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 수서에 있는 모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며 가족같이 지낼 정도로 친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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