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아웃에서 노래자랑 이벤트가 열리는 건 처음 봤다.
LG 선수들의 삭발 대열에 외국인투수 벤자민 주키치도 합류했다. 비로 경기가 중단되자 LG 덕아웃에선 선수와 코치가 배트 그립 부분을 입에 대고 노래 장기자랑을 했다. 6연패중인 팀이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끈끈했다.
29일 인천 문학구장. 경기전 원정팀 LG의 주키치가 모자를 벗자 여기저기서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갓 불가에 입문한 스님처럼, 주키치는 그야말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였다. 보통 외국인투수가 삭발하는 경우가 잘 없다는 걸 감안하면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2년차 주키치의 의리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연패중인 LG 선수들은 하루전인 28일 잠실 KIA전을 앞두고 단체 삭발 결의를 했다. 주장 이병규가 머리를 짧게 깎은 채 출근했다. 그러자 몇몇 선수들이 미용실에 다녀왔다. 시간이 없는 선수들은 즉석에서 머리를 밀기도 했다. 정성훈이 마침 이발 도구가 있었고, 이동현이 이발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날 단체 삭발에도 불구하고 KIA에 졌다.
이튿날 주키치도 동료들과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었다. 본래 지난해부터 가끔 머리를 짧게 깎은 적이 있지만 이번엔 팀분위기를 위한 행동이었다.
김기태 감독은 주키치를 보더니 그의 머리를 만지며 "대체 어떻게 된거냐"며 웃었다. 주키치도 창피한 표정 없이 모자를 벗어 모두에게 삭발한 머리를 내보이며 감독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병규 "감독님! 스마일!"
주장 이병규가 덕아웃을 거쳐 그라운드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취재진에 둘러싸인 김기태 감독을 보더니 "감독님, 스마일!" 하고 외쳤다. 연패중이지만 힘을 내자는 의미.
김 감독은 웃으며 "야, 내가 표정이 안 좋아? 내가 언제 안 좋았는데"라고 말했다. 가던 길을 되돌아온 이병규는 "이동하는 버스에서 감독님 표정이 안 좋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짐짓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 김기태 감독은 벤치에 있던 박용택에게 "야, 내가 진짜 버스에서 표정이 어두웠냐?"라고 물었다. 박용택은 "감독님 보다는 주장이 표정이 더 안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김기태 감독이 올해 선수들을 통솔하는 방식은 두가지다. 원칙을 어기는 선수에겐 용서가 없다. 대신 평소엔 선수들에게 감독이 아닌 '큰 형님' 스타일로 다가선다. 그러니 선수들도 스스럼없이 감독에게 말을 걸고 솔직한 표현을 한다.
덕아웃 노래방 탄생
부산 사직구장을 세계 최대 규모의 노래방이라고 한다지만, 이날 문학구장 원정 덕아웃은 갑자기 진짜 노래방으로 변했다.
이날 저녁 7시4분 현재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됐다. 내야 그라운드에 방수포도 깔렸다. 정황상 경기 취소가 유력해보였다.
잠시후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LG 덕아웃에서 내야수 오지환이 배트 그립 부분을 입에 댄 채 노래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코치들중 누군가가 "축 처져있지 말고 노래나 한번 해봐"라고 요청했을 게 틀림 없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곡명은 윤도현밴드의 '나는 나비'였다.
더 충격적인 장면이 곧 이어졌다. LG 최태원 코치가 역시 배트를 잡고 온몸을 흔들며 20년도 훨씬 더 된 노래인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를 열창했다. 덕아웃의 모든 멤버가 편안하게 웃었고, 김기태 감독도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이 과정에서 윤진호는 노래 대신 잠시 댄스를 선보였다. 결국 경기는 우천 연기됐다.
이날 LG 덕아웃의 노래 경연을 경망스럽다고 보는 시선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여름의 문턱에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LG이기에 "저 친구들, 진짜 멘탈붕괴된 것 아닌가"라고 놀리는 목소리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특히 연패중인 팀이어서 더욱 신선했다. TV 카메라에 뻔히 잡힐 거라는 걸 그들이라고 몰랐을까. LG 주장 이병규는 이날 "아직 5할 승률에서 마이너스 4일 뿐이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5할 승률을 회복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인천=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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