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유교의 영향을 받아 가정 내에서 장남이 중시되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가령 LG그룹의 경우 구인회 창업주에서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본무 회장으로 그룹 승계가 이뤄졌다. 또 한화그룹도 김종희 창업주에 이어 장남인 김승연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이 유력한 '대권 후계자'다.
그렇다고 장남에게 무작정 '대권'을 넘겨줘 온 것은 아니다. 장남이 낭비벽이 심하다거나 경영능력이 형편없이 처지는 등 중대한 결격 사유가 발생하면 다른 형제에게 경영권이 돌아갔다.
재계에선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장남인 이맹희씨 대신 3남인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을 승계시킨 것을 두고도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 또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은 장남인 정몽필이 사망한 뒤 차남인 정몽구 회장에게 그룹을 승계시키는 대신 아들들에게 골고루 회사를 나눠주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두산그룹처럼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총수를 맡는 것은 흔치않은 케이스.
하지만 삼성이나 현대, 두산그룹의 승계는 큰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고 일반적으로 '장남승계'가 대세를 이뤄왔다.
이런 재계의 장남 상속원칙이 최근 들어 흔들리면서 상속이 다변화하고 있다. 차남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은 물론이고 딸이나 부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 이는 세계 최저 출산률과 함께 부모들이 자녀를 많이 낳지 않으면서 장남 선호사상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갈수록 옅어지면서 자식들의 성별조차 구분하지 않는 게 요즘 세태다.
거래소 상장회사인 영풍제지의 이무진 회장(79). 그는 지난달 초 이 회사의 지분 51.28%를 재혼한 부인인 노미정 부회장(44)에게 모두 증여했다. 이 회장보다 35세의 연하여서 화제를 뿌린 노미정 부회장은 영풍제지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사실상 경영권 승계가 이뤄졌다는 해석. 노미정 부회장은 지난 2008년 이 회장과 결혼했고 2012년 2월 이 회사의 부회장으로 입사했다.
영풍제지 관계자는 "회사의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회장님이 하신다. 노 부회장은 회장님과 함께 매일 서울사무소로 출근하고 있으며, 평택 공장을 오가며 경영 전반을 챙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무진 회장에게 자식이 없는 게 아니다. 이 회장은 1956년생과 1960년생인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은 지난 2002년 영풍제지 대표이사를 맡았다가 2009년 물러났다. 차남도 3년 전 등기임원으로 선임됐으나 현재는 이 회사의 어떤 직책도 맡지않고 있는 상태. 이 회장의 두 아들은 영풍제지 지분도 일체 보유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선 이 회장의 아들들이 경영에서 완전 배제된 것은 경영능력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노미정 부회장은 지난해 회사의 경영을 총괄한 이후 실적을 보여줬다. 지난해 3분기까지 8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린 것. 제지업계가 호황을 맞은 것에도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으나, 3분기까지의 실적만을 놓고보더라도 창사 후 사상 최대의 실적이라는 게 회사측의 설명. 결국 이같이 뛰어난 실적을 일군 것이 창업자인 이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엄청 힘들게 자수성가한 오너일수록 경영권 승계를 할 때 고민을 많이 한다. 능력이 떨어지는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줬다가 자칫 피땀흘려 일궈놓은 재산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녹십자도 장남이 경영권에서 배제된 사례. 녹십자 창업자인 고 허영섭 녹십자 회장은 지난 2009년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 장남을 유산상속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장남인 허성수 전 녹십자 부사장은 이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과 복지재단에 재산을 나눠주도록 한 것은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가 최근 대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았다. 허성수 전 부사장은 미국에서 15년간 거주한 뒤 2005년 녹십자에 입사했으나 부친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 회장은 차남인 허은철씨는 녹십자 부사장으로 , 3남인 허용준씨는 녹십자홀딩스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대웅제약에서도 차남 윤재훈 부회장이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송진현 기자 jhso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