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도 많고 말(言)도 많은 경마장에 말(言)로 먹고 사는 직업이 있다.
말(馬)이 달리는 것을 중계한다 해서 '마나운서'로 통하는 장내 방송 아나운서들이 바로 그들이다.
제15대 마사회장 김동하씨(작고)가 1971년 11월 취임해서 초도순시를 하다 방송실에 들러 중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벌어먹고 사는 직업도 참 여러가지구먼"했다는 이색 직업이다.
이들은 입을 바쁘게 놀리며 말들의 숨가쁜 승부장면을 생생하게 중계, 경마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지만 이들의 이면에는 숱한 해프닝과 애환이 담겨있다.
심심찮게 실수를 범해 경마팬들을 분노케 하거나 기수와 경주마의 생사를 뒤바꿔 발표했다가 처벌을 받기도 해 '경마중계는 잘 해야 본전, 못하면 징계'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사실 경마중계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뚝섬 경마장 시절인 1979년의 일이다.
당시 한명 뿐이던 마나운서 김모씨(당시 35)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대타자'를 구하지 못해 중계방송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마장을 찾은 경마팬은 육성 중계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장외발매소를 이용하는 경마팬들은 육성 중계가 절실하기 때문에 거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방송실 관리자인 홍보계장 강모씨(당시 29)가 용감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강계장은 '대타자'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방송 아나운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도 경마를 모르기 때문에 경마 방송 중계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타자'를 못 구하자 위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책임지고 구해내! 정 못 구하면 당신이 직접 하든지!"
강계장은 이래서 본의 아니게 중계 마이크를 잡게 됐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마나운서들이 하는 모습을 뒷전에서 무수히 지켜봐왔는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이크 앞에 앉고 보니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우선 "말들이 잘 달리고 있습니다"라고 한마디 하고 나니 그 다음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서 "말들이 아주 달리고 있습니다", "말들이 시원하게 달리고 있습니다"라고만 계속했다.
그러던 차에 말 한마리가 추격에 나섰다. 이를 본 강계장은 드디어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꺼리가 생겨 "2번마가 추격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중계를 했는데 강계장의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2번마는 이미 선두에 나서 있었다.
강계장은 이 바람에 당황해 할 말을 잊고 또 "말들이 잘 달리고 있습니다"만 연발했다.
강계장에게 레이스가 치러지는 2분여가 그렇게 길 수가 없었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은 땀방울이 어느덧 전신을 흠뻑 적셔왔다.
강계장은 너무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것 같아 이번에는 패턴을 바꿔 "말들이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라고 시간을 끌며 또박또박 말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출전마들은 모두 결승선을 통과하고 말았다.<전 스포츠조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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