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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께서는 반드시 내야 하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면 사명감을 가지고 출판하셨습니다. 그게 출판사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정무영 을유문화사 대표가 선친 정진숙 선생(1912∼2008)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며 여러 고비를 겪었지만, 그런 사명감이 위기 때마다 극복의 단초가 됐다"고 회고했다.
을유문화사 책들은 고색창연하다. 대표작인 세계문학전집만 해도 고동색 하드커버로 이뤄졌다. 날렵하고, 트렌디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자주 보다 보면 중후한 품격이 느껴진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침 많은 출판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관록도 엿보인다.
을유문화사는 1945년 12월 창립됐다. 이른바 '해방둥이'다. 1945년, 을유(乙酉)년에 설립됐다 해서 '을유문화사'다. 30대 초반이었던 민병도, 정진숙, 윤석중, 조풍연 씨가 뜻을 모았다.
당시 은행원이었던 정진숙 선생은 처음에 출판업 진출을 머뭇거렸다고 한다. 은행원 특유의 보수성이 본능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다. 집안 어른이었던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에게 자문한 끝에 출판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36년간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 역사, 문화 그리고 말과 글을 다시 소생시키는 데 36년이 더 걸릴 것이므로 이런 사업(출판업)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건국 사업이야." (정인보)
고민은 깊었지만, 뜻이 정해지자 정진숙 선생의 행동은 빨랐다. 을유문화사는 창립 이듬해 한글의 원상회복을 위해 만든 첫 책 '가정 글씨 체첩'(1946)을 시작으로 청록파 시인 박목월·박두진·조지훈의 공동시집 '청록집'(1946), 염상섭 소설 '삼대'(1947), 홍명희 대하소설 '임꺽정'(1948) 등 국문학사에 남겨질 중요한 문학 작품을 잇달아 발간했다.
또한 '우리말 큰사전'과 '한국사', 을유문고(1948∼1988), 세계문학전집(1959∼1975) 등 다양한 책을 내며 출판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말 큰사전'이나 '한국사' 같은 대작은 10년 가까이 걸려 좌초될 위기를 겪은 끝에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정 대표는 "'조선말 큰사전' 등은 사명감 없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며 "선친께선 항상 말씀하시던 게 '출판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문화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저는 선친의 뜻을 이어가고자 했을 뿐"이라고 돌아봤다.
근년에는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 현대와 고대의 고전을 골고루 선보이고 있으며 2008년부터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을유세계문학전집'을 꾸준히 내고 있다. 피나 바우쉬· 빌 에번스·글렌 굴드·타르코프스키 등 다방면의 거장을 조명하는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도 마니아층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을유세계문학전집'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41권을 출간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역자들이 작품의 숨결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정본(定本)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045년 창립 100주년에 즈음해 총 300권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이 새로운 시대에 독자들의 마음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을유문화사는 꽤 오래된 출판사지만 미래 세대를 책임질 젊은 독자들과의 만남도 이어가려고 노력 중이다. 당장 내달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10년 만에 참가한다. 80주년 기념 책자, 리커버 도서, 한정판 굿즈 등을 마련해 소통의 장을 넓히려는 계획이다.
정 대표는 "어떤 방식이 옳은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면서도 을유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방식을 계속해서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을유문화사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유의 책들은 꿋꿋이 제 몫을 해 주었지요. 앞으로도 인문, 예술, 문학 분야의 책들을 중심으로 을유만의 특색이 살아 있는 콘텐츠를 선보이고자 합니다."
buff27@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