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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입찰에서 제외됐으니 너무 억울하죠. 조달청이 중소기업을 진짜 보호하는 기관이 맞나요…"
춘천에서 폴리에틸렌(PE) 하수관 전문 제조업체 '월드케미칼'을 운영하는 박재희(53) 대표는 2021년 2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 경남지역본부가 조달청 나라장터에 낸 관급자재 제안공고를 보고 입찰 제안서를 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사전판정제외'라는 탈락 결과였다.
물품 다수공급자계약(MAS) 업무처리 규정과 다수공급자계약 2단계 경쟁 제안공고 운용요령에 따라 수요기관이 2단계 경쟁 시 제안서 평가에 앞서 제품 규격 등을 기준으로 참여업체를 사전 판정해 평가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었는데, LH 경남지역본부가 '월드케미칼의 물품은 규격이 다르다'고 판단해 제외했기 때문이다.
규격에 적합한 제품을 제안하고도 제안서를 본격적으로 평가하기도 전에 LH 경남본부가 임의로 배제하는 바람에 박 대표를 포함한 12개 업체의 제안서는 휴지통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조차 없어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이는 곧 규격 착오라든가 업무 미숙,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해 적격한 업체가 부당하게 제외되어 피해를 보더라도 전혀 구제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요기관과 마찰을 빚었다가는 앞으로 입찰을 따내기 어렵다거나 보복성 제재 등에 대한 두려움에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달라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상황이었다.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결심한 박 대표는 2023년 8월 열린 '기업호민관과 함께하는 찾아가는 기업규제 현장간담회'에서 중소기업이 억울한 피해를 봤는데도 이의신청 절차를 마련하지 않은 조달청의 부작위를 지적하며 규제 개선을 건의했다.
'기업호민관'은 강원도가 규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위촉해 법령과 제도로 인해 기업 운영의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규제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전국 광역지자체 중 최초로 도입한 제도다.
기업호민관을 맡고 있는 이주연 아주대 교수는 그해 10월 행정안전부에 중앙규제 개선 과제로서 공식 건의하고, 이듬해 2월 중소기업 옴부즈만 제도를 통해서도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12월 조달청으로부터 '수용 의견'을 끌어냈다.
이후 지속적인 협의와 조정을 거쳐 규제 개선을 건의한 지 1년 11개월 만인 올해 6월 물품 다수공급자 업무처리규정에 '2단계 경쟁 사전판정에 대한 기업의 이의제기 절차 신설'로 이어졌다.
이로써 앞으로는 공급자계약 2단계 경쟁에 참여하는 전국 모든 기업이 사전판정에서 '부적격' 판정받았을 때 이의신청을 통해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박 대표와 강원도가 끈기 있게 낸 작은 목소리가 만들어낸 큰 변화다.
이주연 기업호민관은 "불합리한 규제로 인해 월드케미칼 외에 전국의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마땅히 해결되어야 할 건의 사항이라고 생각했다"며 "중앙부처 관련 규제이다 보니 오랜 협의 끝에 관련 규정을 개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복호화' 프로그램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조달청은 입찰 제안서를 암호화해서 보관하는데, 제안서 평가 기간에는 암호화된 데이터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복호화'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복호화가 불가하다.
만일 입찰이 종료된 뒤 수요기관의 비리가 밝혀지거나 뒤늦게 입찰에서 부당하게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제안서를 열 수가 없기에 피해회복에 걸림돌이 된다.
박 대표는 LH 경남본부의 관급자재 구매 입찰에서 부당하게 제외된 사례를 들어 그간 조달청에 복호화 프로그램을 개선해달라고 수년간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조달청은 유사한 입찰 공정성 훼손 사례가 없다거나 개발 실익이 없으며, 차세대 나라장터 개통을 준비 중이므로 기존 나라장터 시스템의 변경은 중단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의 조달개혁 방안 마련 지시에 따라 개설한 소통 창구 '조달개혁 과제 사서함'에는 다수공급자계약과 관련한 제도 개선 등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기업인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박철 중소기업중앙회 강원지역본부장은 "박 대표만의 손톱 밑 가시가 아니라 기업인들이 그동안 얼마나 속앓이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달행정이 많이 발전해오긴 했지만, 현장의 속도보다 늦다 보니 민원이 많다"며 "수요자들과 기업인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서 더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되길 바란다"고 했다.
conanys@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