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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한국군, 무전기 대신 카톡으로 전쟁할건가"…前특전사령관

기사입력 2025-08-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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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공군은 2025년 4월18일 공군 광주기지에서 '프리덤 플래그(Freedom Flag)' 훈련 미디어데이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공군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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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인터뷰 기사는 내용이 많아 5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첫번째인 이번 기사는 군의 기초장비 등을 다뤘습니다. 나머지 기사는 군의 훈련, 병역의무, 신세대 병사, 이외의 군 문제 등을 순서대로 다룰 예정입니다. 구체적인 송고 시기는 유동적입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의 성장 스토리와 개인의 사진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우리 한국군은 전투기, 함정 등 첨단 무기에서는 북한보다 우수하지만, 기초장비가 부족합니다. 군인이 작전할 때 무전기가 충분하지 않아서 소대 단위에서는 카톡을 사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텐트, 발전기, 보안경, 청력 보호장비 등도 충분히 공급돼야 합니다. 첨단 무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초장비가 잘 갖춰져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전인범 전(前) 특전사령관은 지난 7월 20일을 시작으로 3차례에 걸쳐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국방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므로 국방 예산은 충분히 배정돼야 한다"면서 "국방예산은 지금의 2배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전쟁에 철저히 대비해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서 "정부와 군은 국회의 영향을 받고, 국회는 국민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국민이 안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전인범 전(前)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전투부대 대대장과 사단장을 거쳐 한미연합사령부 작전 참모차장, 육군 특전사령관(중장) 등을 지냈다.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당시 이기백 합참의장의 부관(중위)이었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의장을 살려낸 공로로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그가 군 생활 중에 받은 훈장은 모두 11개에 달했다.

전역 후에는 미군 육군협회 석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해외 세미나 등에 적극 참여해 한미 동맹 강화 등에 노력하고 있다. 유튜브 활동을 통해서도 국방력 향상에 대한 국회와 정부,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애정이 많아 동물자유연대 이사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서울이다. 1958년 서울 위생병원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황해도 출신인데, 남북한이 분단되기 전에 한국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 할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자 귀국하셨다. 아버지는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성공적으로 운영하지는 못하셨다. 아버지는 선한 성품을 가졌던 분인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사업에 실패했던 것 같다.

-- 사업가 할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할아버지가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선생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 왔다가 고향인 황해도 평산으로 되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유일한 선생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유일한 선생은 아버지의 외국어 능력 등을 보고는 유한양행의 북경지사 대표를 맡기셨다. 일제 말기에 유일한 선생은 하와이에 갔다가 나오지 못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자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억류했는데, 유일한 선생은 서류상으로는 일본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유한양행 대표직을 맡아서 회사를 이끌었다.

-- 할아버지는 유한양행으로부터 독립해서 사업을 크게 벌였다고 하던데.

▲ 유한양행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전신양행, 전신운수 등을 설립하셨다. 전신운수는 한때 보유 선박이 80척에 달할 정도로 번창했다.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배짱이 있었으며, 사업 감각도 남달랐다고 한다. 할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다.

-- 어머니(홍숙자)는 어떤 분이었나.

▲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었고, 애국심이 강하셨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를 임신한 지 7개월 정도 됐는데, 정확한 임신 개월 수를 속이면서까지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에서 나를 낳기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의 자식은 한국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학생들의 목표 중 하나가 미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미국 시민권 획득을 위해서다.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1968년 '김신조 사건' 당시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만약에 공비가 나를 포로로 잡고 협박하면 나를 희생하더라도 굴복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데, 보통 어머니와는 다른 듯하다.

▲ 그때 나는 10살밖에 안 됐는데,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시니 무서웠다. 아무튼 어머니는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만약에 내가 국가를 위해 죽었다면 슬퍼하셨겠지만, 자랑스러워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속속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청와대 근처인 세검정까지 침투한 사건을 말한다. 공작원 29명은 사살됐고, 1명은 미확인이며, 김신조는 투항했다.)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떠했나.

▲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금호동에 있는 대경중학교를 거쳐 경기고에 들어갔다. 그때 경기고는 시험이 아닌 추첨 방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당시는 외우는 게 많았고,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니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다.

--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정도이면 고교 학업성적이 우수했을 듯한데.

▲ 1977년도 370명의 육사 입교생 가운데 나는 꼴찌에서 두 번째로 들어갔다. 당시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였다. 첫 번째 과목인 국어시험을 볼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두 번째 시간은 영어 과목이었는데, 잘하면 100점을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사 교수들이 100점을 줄 수 없어서 99.9점을 줬다고 한다. 수학 점수도 좋지 않았다.

-- 영어 과목의 점수가 좋아서 다른 과목의 부진을 만회한 것인가.

▲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경기고에서 30∼40명이 육사에 지원했지만 2명만이 합격했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의 한 선생님은 "전인범이 육사에 합격한 것은 사람에게 초지일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 언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나.

▲ 어렸을 때부터 군인을 동경했었던 것 같다. 당시 미국 드라마 '전투(Combat)'를 많이 봤는데, 주인공 손더스 중사에 푹 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삼촌과 함께 국군의날 퍼레이드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삼촌은 "인범아, 너도 저렇게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육사에 가야 해"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육사가 뭔지도 모르고 육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육사 생활은 어떠했나.

▲ 나는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선배들이 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2학년의 한 선배가 우리들의 뺨을 때리곤 했다. 얼굴을 때리는 것은 모욕적인 행위라고 판단돼서 나를 포함한 우리 동기생 7~8명이 4학년 선배한테 찾아갔다. 이게 문제가 됐다. 그 2학년 선배는 4학년 선배한테 한 소리 들었고, 곧바로 우리들을 집합시켰다. 그는 우리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4학년 선배에게 일러바친 놈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나 혼자만 손을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난이 시작됐다. 반복적인 괴롭힘과 얼차려를 받았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 육사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본인은 육사 2학년 때부터 후배들에게 엄격한 규정 이행을 요구했다고 하던데.

▲ 나 스스로가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 4학년이 되면 단화도 잘 닦지 않지만 나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육사 시절 내내 거의 웃지도 않았을 정도다. 나는 후배들이 규정을 위반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내 별명이 '잔인범'이었다.


-- 육사 시절 본인의 성적은 어떠했나.

▲ 1∼2학년 때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 3학년 때는 전공으로 전사과(전쟁역사과)를 선택했는데, 전쟁사는 의외로 흥미로웠다. 감화받는 순간도 있었다. 다른 생도들과 달리 나는 영어로 된 책까지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니 지식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당연히 전쟁사 점수가 좋았다. 나는 4년 평균 기준 종합성적으로는 중간 정도의 등수로 졸업할 수 있었다.

-- 전쟁사에서 감화받는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인가.

▲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니 반드시 이긴 전투만이 위대한 전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더라도 멋있게 지는 전투가 있다. 열심히 끝까지 싸우는 전투가 그런 전투다

-- 육사 37기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도 있었다고 하던데.

▲ 그는 중고교 시절에 청와대 경호원이 항상 따라다니니 괴로웠던 것 같다. 자유를 위해 육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동기생 몇 명과 어떤 규정을 위반해서 완전군장 상태로 연병장을 돌았던 적이 있다. 문제는 그걸 마치고는 완전군장 상태로 교문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총까지 들고 있었다. 어떤 철도원이 놀라서 신고했고,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아이스크림 또는 다른 것을 사 먹기 위해 교문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 본인은 육사 졸업 후 육군 소위, 중위를 거쳐 오랫동안 지휘관 생활을 했는데, 한국군의 무기는 전반적으로 북한군보다 뛰어나다는 의견에 동의하나.

▲ 한국군은 전투기, 함정 등에서 북한군에 우위다. 그렇지만 북한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이버전에서는 북한군이 한국군보다 강하다고 본다. 북한은 드론 전에서도 우리보다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로봇에서의 우열은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군 전력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해군이 없는데도 러시아 해군을 거의 무력화시켰는데, 이는 드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 북한군의 기초장비는 어떤가.

▲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북한군의 기초장비는 괜찮다. 북한군이 가진 AK 계열 소총의 신모델은 성능이 좋다. 북한군의 기관총은 우리 것보다 무겁긴 하지만 펀치력(화력)이 강하다. 북한군은 분대별로 사거리 400∼500m의 저격 소총도 갖고 있는데, 실제 전투할 때 상당히 위협적이다. 북한군은 분대별로 1∼2개의 RPG(대전차 로켓)도 갖고 있다. RPG는 원래 탱크를 파괴하는 무기였는데, 이제는 하늘에 있는 헬리콥터를 쏘아 떨어트리고, 부비트랩이 설치된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다목적으로 진화된 무기다.

-- 한국군도 이런 장비를 많이 갖고 있는 것 아닌가.

▲ 분대 단위에는 이런 무기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 한국 육군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군에 대한 우위를 장담할 수 없다. 북한 육군이 선제적으로 기습 공격을 한다면 특정 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선제공격의 이점이다. 예를 들어 북한군 10명, 남한군 10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남한군 1명이 지키는 곳을 북한군 5명이 집중적으로 선제공격하면 남한군 1명은 버틸 수 없다. 일단 1곳이 뚫리면 전체 군대 심리가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이 버티려면 부대 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통신도 잘 돼야 한다. 그래야 지원과 협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상군은 이 두 가지가 부족한 듯하다.

--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 한국의 지휘관들은 경상도, 전라도, 육사 출신, 3사(육군3사관학교) 출신 등의 파벌로 갈라져 있다. 이러니 전쟁 시 제대로 협조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통신 수단도 문제다. 무전기가 충분히 지급되지 않고 있다.

-- 무전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 예를 들어 부대에 무전기 100대가 필요하면 110∼120대를 지급해야 한다. 고장 나고 분실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80대만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무전기는 왜 충분히 지급하지 않나.

▲ 예산 문제 때문인 듯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현재는 소대장이 중대장한테 보고할 때 카톡을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다. 군인들이 카톡을 사용하면 군사비밀이 유출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전쟁 시 군 통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적군이 가장 먼저 공격하는 대상 중 하나가 통신 중개소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카톡으로 전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대급 이상은 위성통신을 사용해서 나아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아래의 중대, 소대, 분대에서는 여전히 통신의 문제가 있다. 전투할 때는 상황에 따라서는 무전기로 비행기를 불러서 특정 지점에 폭탄을 떨어트리도록 해야 하는데, 카톡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 현재 작전 훈련 때 무전기가 부족하면 어떻게 하나.

▲ 다른 부대에 가서 빌려오는 경우가 있다. 발전기도 마찬가지다. 무전기 충전을 하려면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금은 부족한 상황이다. 작전 훈련을 위해 텐트를 빌려오는 일도 있다.

-- 한국군 무전기의 기술 수준은 어떠한가.

▲ 무전기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군에 할당된 주파수 밴드가 충분하지 않다. 과거와 달리 현대전에서 무전기는 동영상, 사진, 데이터 등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주파수 밴드가 충분하지 않으면 이게 원활하지 않게 된다. 정부와 군은 이 문제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이밖에 부족한 군사 장비가 있다면

▲ 우리 군이 보유 중인 포탄과 총탄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야간투시경, 쌍안경, 나침(나침반)도 부족하다. 보안경과 소음방지 장비도 충분히 지급했으면 한다. 보안경이 없으면 미세한 파편에 의해서도 실명(失明) 할 수 있다. 소음방지 장비는 전투 중에 총소리와 포탄 소리는 잘 안 들리고 사람 목소리는 잘 들리도록 해준다.

-- 전투복도 개선해야 한다고 했는데.

▲ 전투복에 불이 붙으면 피복이 녹아서 살에 붙고, 이걸 떼어내면 피부가 손상될 수 있다. 이런 점은 개선돼야 한다고 본다. 전투복은 4만원대로 알고 있는데, 이를 10만원짜리로 바꿔줬으면 한다. 전투할 때 군인은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기도 하니 전투복 재질은 좋아야 한다. 군화는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 방탄조끼는 모든 군인에게 지급되나.

▲ 전방의 군인들에게는 모두 지급됐다. 후방의 군인들에게는 100% 지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방탄조끼는 완벽하게 몸을 보호하기는 어렵다. 방탄조끼를 개량하면 이걸 뚫는 총탄이 또 개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탄조끼는 군인 전체에게 지급하는 게 맞다.

-- 예비군에 지급할 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 예비군이 300만여명인데, 지급할 M-16 소총은 100만정 안팎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투가 진행 중인데 3교대로 총을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현재 예비군용 탄띠와 헬멧도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

-- 국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안보에는 여야(與野)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야에 안보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보 문제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의 단결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 정부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 군(軍)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빨리 고쳐나갔으면 좋겠다. 지금 시작하더라도 10년은 걸릴 문제들이다.

-- 군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지금 군이 어려운 상황이란 것을 잘 안다. 군인들은 서로 존중해주고 좀 더 용기를 내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노력했으면 좋겠다.

-- 국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많은 선조와 선배들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자유롭게 살려면 지금 우리 국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적어도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keunyoung@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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