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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농구의 '조종' 울린 날, 그들은 말이 없었다

by 남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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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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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붕괴된 한국 여자농구의 자존심, 과연 이를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2012년 7월1일은 한국 여자농구사에 '최악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여자 농구대표팀은 이날 터키 앙카라 앙카라아레나에서 열린 숙적 일본과의 패자전 준결승에서 51대79로 대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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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처럼 졸전을 벌인 적은 없었다. 지난해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편파판정을 등에 업은 일본전에서 17점차를 극복하고 승리를 하는 등 최근 일본전에서 쉽지는 않지만 5연승을 거뒀던 한국 여자농구였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아쉽게 중국에 분패할 정도로 여자농구는 형편없는 실력이 결코 아니다.

선수를 탓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의 멤버와 큰 차이는 없었다. 당시에 하은주가 뛰기는 했지만, 대신 변연하는 부상으로 인해 대표팀에 합류조차 하지 못했다. 정선민 박정은 등 백전노장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대표팀에서 은퇴한 상태였기에, 세대교체의 과정이라고 치부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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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에서 하은주가 뛰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는 나머지 11명의 선수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하은주는 어차피 풀타임으로 뛰는 선수도 아니다. 승리를 가져다주는 보증수표는 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선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은주의 경우 이미 대표 선발 전부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에, 선발된다해도 경기에 나서기는 힘들다는 전망은 수차례 제기됐다. 정규시즌 때도 동료들과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경기에만 뛰는 정도에 그칠만큼 하은주는 늘 부상을 달고 산다. 그런 선수를 뽑아가서 '못 뛰는게 아니라 안 뛰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으니 본인의 마음고생은 물론 선수단의 분위기가 결코 좋을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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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수들의 실력을 하나로 집중시켜 한국 여자농구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은 대표단을 구성한 대한농구협회와 사령탑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미 감독 선발이나 선수단 구성부터 불협화음이 나면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이번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긴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고된 인재였던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협회의 코드 인사, 그리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의 부재였다. 여자 농구 대표팀의 경우 협회의 강화위원회가 모든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협회에선 지난 3년간 대표팀을 잘 이끌어 오면서 좋은 성적을 낸 신한은행 임달식 감독을 별다른 이유없이 내치고 지난 시즌 4위에 그친 삼성생명의 이호근 감독을 대신 앉혔다.

변화를 주자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철저한 '정실 인사'였다. 강화위원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협회 박소흠, 진성호 부회장, 정미라 기술이사 등이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박 부회장이 지난 2009년과 2010년 당시 협회 소속이 아니었던 정 이사를 대표팀 코치로 발탁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임 감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임 감독이 협회의 대표팀 지원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 그런데 마침 협회 여자농구 기술이사 자리가 공석이 됐고 지난해 10월 정 이사를 이 자리에 앉히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진행됐다.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절체절명의 대회를 앞두고 오히려 안정이 필요했음에도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결정했다는 것은 여자농구의 올림픽 진출을 애타게 기다리던 농구계 그리고 국민들에 대한 '기만'이자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비난 여론이 들끓었음에도 협회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참사로 이어지게 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이들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다보니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들에게 대표팀 구성에 대한 권한은 주어졌지만, 이들에게 한국 여자농구의 자존심을 철저히 뭉개버릴 '권한'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따올 것이라 여겨졌던 런던행 티켓을 놓치면서 이번 대회 단장을 맡은 박소흠 부회장의 내년 대한농구협회장 입성에 대한 꿈도 함께 사라질 처지다. 정미라 기술이사는 대회 전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왜 미리 비난을 하느냐. 결과과 나오면 그 때 책임지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이미 협회 내에서도 사퇴를 종용받았던 정 이사는 이번 실수로 자신의 농구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됐다. 대표팀 이호근 감독 역시 선수단 구성과 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게 됐다.

한국 여자농구는 위기의 기로에 서 있다. 신세계가 해체되면서 프로농구단이 5개로 축소됐고, 인수기업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여자농구연맹은 회장을 비롯해 집행부가 전원 사퇴하면서 지도력 위기를 맞고 있다. 런던올림픽에 나가서 좋은 경기력으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여자농구의 부흥을 위해 뛰겠다던 선수들의 간절한 바람도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앞으로의 여자농구를 위해서 '소'를 잃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이에 대한 책임있는 답변을 듣고자 협회 김상웅 전무이사, 정미라 기술이사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여자농구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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