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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으로도 유명한 판전에는 화엄경, 금강경 등 불교 경판 3,479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좌상, 천왕문의 사천왕상 등 여러 유형문화재와 위패, 범종, 산신도, 독성도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1박 2일간의 템플스테이를 체험할 수도 있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으며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지친 마음을 쉬어가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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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학圓學 스님은 지난 12월 제 25대 봉은사 주지 취임 이후 예불을 거르지 않고 직접 염불을 집전하며, 불교대학과 불교아카데미를 통해 하루 4시간씩 신도들과 만나는 등 수행정진으로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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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얼마전 세계수학자대회에 온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과 함께 템플스테이를 진행해 참가자들은 스님과의 차담, 연꽃등 만들기, 참선 수행 등을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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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템플스테이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박 2일간 정기적으로 영어로 진행되고 있으며 전화 및 이메일로 예약 신청이 가능하다.
원학 스님은 "도심 한복판 전통사찰로서 포교에 소홀할 수 없다"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포교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정서를 사찰에서 느끼게 하는 자체도 포교"라고 강조하며 "자연 속에서 문화를 재현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 포교의 한 부분일 것"이라고 역설했다.
원학 스님, 초의선사 <동다송> 원문 번역집 출간
"차와 사람이 다르지 않습니다. 색, 향기, 맛이 차의 세 가지 덕성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사람도 차 한 잔의 여유로 환희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서예와 그림에 조예가 깊은 원학 스님은 초의 선사가 있던 해남 대흥사에 머물면서 동다송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동안 동다송을 번역한 책들이 직역에 그친 사례가 많아 쉬운 번역에 초의 선사의 속뜻을 헤아린 해설까지 담아내고자 출간을 결심해 이루게 되었다.
이번에 출간한 원학 스님의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는 초의선사가 구현하고자 했던 차의 정신과 학문의 세계를 자세한 해설과 주석 해석, 단어풀이, 정연한 논리와 학문탐구로 <동다송>을 새롭게 풀어내며 200년 전 초의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차가 곧 수행'이라고 하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동다송>은 우리 차를 철언절구 17송으로 정리한 시집으로 차의 생장과 맛, 차를 대하는 마음, 차 생활을 통한 선의 실현 등을 고사를 인용해 노래했다. '동다'는 초의 선사가 우리 차를 중국차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그간 국내 <동다송> 번역은 5종 있지만 대부분 직역으로 대중이 읽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간과한 원학 스님은 1998년 조계종 종단사태 후 중앙소임을 내려놨을 때 지방에서 <동다송> 강의를 하고 원고를 집필한 것을 다듬어 이를 쉽게 풀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스님은 "초의 선사가 <동다송>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려던 메시지는 차를 통해 우리 마음의 모습을 바로 보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차 색깔처럼 밝고 맑은 삶, 차 향기와 같은 향기 나는 삶, 차 맛처럼 맛깔 나는 삶을 차를 마시는 여유를 통해 일깨우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조선 후기의 고승인 '초의 선사'는 조선의 다경(茶經)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차 문화를 대표하는 저서인 <동다송>을 썼고, 찻잎을 따서 닦고 우리고 마시는 법까지 상세히 기록한 <다신전>이란 책을 남겨 다성(茶聖)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차를 '동다(東茶)'라 이름하고 선수행과 차를 일치시켜 차문화를 크게 일으킨 장본인이다.
원학 스님은 "초의 선사는 억불숭유로 승려가 도성도 출입하지 못하던 때, 차를 매개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층과 교류했으며 차를 통해 차 생활이 마음공부[禪]와 다름 없다는 것을 유생들에게 알린 포교전문가였다"고 말했다.
이는 초의 선가가 머물던 일지암이 자리한 대흥사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국가의 불교 지원에 사세가 흥했던 다른 사찰과 달리 대흥사는 국가가 불교를 홀대했을 때 세를 확장했던 것이다.
"사향이란 참 향기, 난초 향기, 맑은 향기, 순수한 향기를 말하는데 차에서 사향을 드러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다경'에서 말하는 아홉가지 어려움, 즉 구난(九難)을 극복해야만 사향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향이란 차를 내는 사람의 정성이 빚어 낸 결과물입니다. 그 정성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또한 차를 통해 대자연의 생명과 함께 호흡하는 삶이 진정한 다도입니다. 뭇사람들과 인연 맺고 서로 위하며 은은한 인정 나누며 사는 게 지혜로운 삶입니다"
"선악을 구별해 욕심을 조절하고 화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순응하는 물처럼 남을 용서할 줄 알고 모든 생명체를 존중할 줄 아는 경앙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늘 거울처럼 닦아 티끌이 머물지 않게 하고, 마음이 가는 길을 잘 살펴 항상 자신이 있는 본래 그 자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원학스님은 "한잔의 차 안에서 우주를 느끼고 하늘과 별빛의 정기를 생각하며 마신다면 그냥 마시는 차와는 완전히 느낌이 다를 것이다"며 "그런 차에는 엄숙함과 경건함이 깃들고 무릇 차 한잔을 통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는 기분이 들 것"이라고 말해 이번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
초의(草衣, 1786~1866) 선사는 누구인가
초의(草衣, 1786~1866) 선사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운흥사(雲興寺)에서 출가해 19세에 대흥사(大興寺)의 완호(玩虎) 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와 초의라는 호를 받은 승려이자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차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 관련 서적이자 중국의 육우가 쓴 <다경>에 견줄 만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한 초의 선사는 학문에 두루 통달했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그보다 24세 더 많던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 정약용을 만나 시문과 서화, 그리고 차를 매개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다산은 그의 시에서 초의를 평하길 '남루한 옷 민둥머리에 중의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드러난다'고 하여 학식의 높음을 칭송했다.
1815년에 한양으로 올라간 초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자하(紫霞) 신위(申緯),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돈독한 교분을 쌓고 유(儒)·불(佛)·선(禪)을 논하며 사상적 기반을 넓혔다. 그는 이러한 교유 속에서 자연스레 차와 가까이 했다.
초의는 1824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줄곧 해남 대둔산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 기거하면서 수행과 집필에 몰두했다. 1828년에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청(淸)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萬寶全書)>의 <다경채요(茶經採要)>를 베껴 <다신전(茶神傳)>을 초록(抄錄)해 냈다. 초의가 제다와 차 생활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낸 이유는 승가의 차 풍습을 이어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도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초의는 『동다송』을 통해 차나무의 생태에서부터 차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가 쌓아온 풍부한 지식을 시의 형식으로 담아냈다. 이 책에서 그는 특히 중국과 우리의 차 만드는 법을 비교하며 우리의 차가 지닌 우수성에 대해 노래했다. <동다송>과 <다신전>, 이렇듯 두 저서로 우리 차 문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초의 선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꼽힌다.
서예와 그림에 조예가 깊은 원학 스님
14세에 붓을 들기 시작해. 16세에 출가한 후에도 사경하며 붓을 놓지 않았던 원학 스님은 해인사의 키작은 도인 지월 스님으로부터 청남 오제봉 선생과의 인연을 맺게 해 주었다.
원학 스님은 범어사 강사를 하며 동대신동 청남 선생의 집까지 세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오가며 글씨를 배웠다. 청남 선생과 의형제를 맺은 효당 최범술, 의재 허백련 선생을 만난 것도 그 때다.
당시 서예 분야에서만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을 뿐 십군자도 공부하지 못했던 때, 의재 선생은 글씨에 이어 십군자, 화조를 그려내야만 산수화를 가르쳤기에 의재 선생으로부터 사사하지는 못 했다. 원학 스님은 훗날 의재의 제자 우계 오우선 선생으로부터 산수화를 사사해 중국 남종화의 맥을 이어갔다.
'대상의 사실성에 충실하는 북종화와 달리 사의(寫意)'를 추구하는 남종화는 불교의 선(禪)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원학스님의 그림은 담백한 수묵과 속기 없는 맑은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불교계 안팎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다.
이렇듯 남종화의 본맥인 허백련-오우선-원학스님을 잇으며 그림을 그려온 원학 스님은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 선생의 수제자인 우계 오우선 선생에게서 전통산수화를, 청남 오제봉 선생에게서 서예를 40년 넘게 사사했다. 불교미술제 우수상(1974), 국전 동아미술제입선(1980)등을 통해 불교계 안팎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스님은 1977년 서울 중앙불교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9년 15년 만의 개인적인 불교중앙박물관 초대전까지 모두 여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스님의 작품은 3년에 걸쳐 완성된 '차를 달이는 집' 임중모옥다연기(林中茅屋茶煙起. 숲 속 초가집에 어느 선비가 앉아 차 달이는 연기가 피어난다) 를 비롯해 '물 흐르는 계곡 가까이 매화꽃 먼저 핀 것 알지 못하고 겨울이 지났는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가를 의심하였네' 등 수십점으로 스님은 "집념의 작가정신을 발휘한 것이라기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수행자의 취미를 화폭에 담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삼이 원학 스님은...
경북 경산의 경주 김씨 집안에서 출생해 열여섯 살 때 도성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원학 스님은 해인승가대학 12기로, '해인승가대학 승가상'을 수상했고, 해인승가대학 총동문회장을 역임했으며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문화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제10?11?12?15대 중앙종회 의원, 서울 조계사, 봉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용연사 주지 등을 역임해 종무행정에도 밝은 그는 2009년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 스스로 '삼이'란 호를 지었다. 삼이는 '총무원 소임은 봉사하는 자리, 즉 머슴살이와 같은데, 귀 밝은 머슴이 되기 위해서는 귀가 세 개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에는 개혁회의 재정분과위원장으로 조계종 개혁에 앞장섰다가, 1998년 종단사태 때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제주도로 내려가 '청묵예원'을 설립하고 묵향에 파묻혀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를 '하심과 인욕을 수련한 보약 같은 시간'이었다고 되새긴다.
국무총리실 소속 '10.27법난 피래자명예회복 심의위원장'으로서 종단과 피해자 스님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2008년에는 '종교 편향 종식 범불교도대회 봉행위원장'으로 종정 표창을 수상했다. 또한 1997년 총무원 문화부장 시절 종교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예술제'를 창설 제1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으로 2012년에 '불교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다송>과는 1994년 초의 선사가 주석했던 해남대흥사 부주지 소임을 볼 때 처음 만났다. 당시 각계 다인들과 함께 초의문화제를 창립 발기하여 초의 선사의 다도정신을 계승하였고, 그때 마음으로 느낀 깊은 '다향'을 오늘의 <동다송>으로 엮는 데 꼬박 20년이 걸렸다.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제22회 '초의문화제 초의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금강경 야부송 번역 해설>이 있다.
원학圓學스님은 수행자다운 곧은 기개와 계행, 정연한 논리와 달변, 수준급의 예술적 소양 등으로 주변으로부터 항상 이 시대 진정한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불리어 지고 있다.
글로벌경제팀 award@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