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 기생하는 산업 생태계 조명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계산대에 밀가루, 설탕, 초콜릿 칩을 올려놓자 점원이 말했다. "왜 이런 재료를 사시는 거예요? 본인이 뚱뚱하다는 거 몰라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감정, 수치심이었다.
수학과 교수 출신으로 베스트셀러 '대량살상 수학무기' 저자인 캐시 오닐은 평소 잘 알던 가게에서 점원의 예상치 못한 이 같은 발언에 수치심을 느꼈다. "이제 곧 박사학위를 받잖아. 내 곁엔 남자 친구가 있어. 난 다정한 사람이야"라고 자위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수치심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근 번역돼 출간된 '셰임머신'(흐름출판)은 수치심(羞恥心)에 관한 책이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건 누군가에게나 하나쯤 있는, 숨기고 싶은 비밀과 관련된 감정이다.
비밀의 깊이만큼이나 상처는 깊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처가 깊어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비즈니스가 끼어든다. 이른바 '수치심 비즈니스'다. 책은 이런 수치심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나아가 부추기는 시스템, '수치심 머신'(Shame machine)을 고발한다.
책에 따르면 2014년 미국 다이어트 리얼리티 '도전! FAT 제로'(The biggest loser)는 방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18㎏에서 47㎏까지 감량한 우승자는 영웅이 됐다. 그러나 영광은 잠시뿐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난 후 트레이너는 사라졌고, 삶도 원래의 리듬으로 되돌아갔다. 우승자는 몇 달 후 9㎏이 늘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참가자 대부분이 원래의 무게로 돌아갔다. 심지어 그로부터 6년 후 참가자 14명 가운데 4명은 체중이 더 늘었다. 살과의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한 것이다. 이들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결국 프로그램을 통해 이익을 본 이들은 참가자가 아니라 방송국과 후원 기업들이었다.
다이어트 산업뿐 아니다. 수치심을 활용하는 곳은 마약 거래상, 재활시설, 제약업체 등 다양하다. 피해자가 자책하고 그들의 노력이 실패할수록 사업가들은 부유해진다. 이런 수치심 비즈니스는 현대에 들어서 활황을 맞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셜미디어 덕택이다. 소셜 미디어는 수치심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거대 디지털 기업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알고리즘을 활용, 외모나 조악한 취향, 정치 이슈를 놓고 서로 조롱하도록 갈등을 부추긴다. 이런 흐름은 기업의 이윤뿐 아니라 혐오 정서를 군중에 전파하며 수치심의 악순환을 조장한다.
저자는 수치심에 맞서려면 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수치심 머신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해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수치심의 첫 두 단계(상처와 부정)를 지나 "현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다고 덧붙인다. "개인 차원에서 떼로 몰려가 약자를 비하하는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라"고 저자는 권한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동은 남들이 약자를 놀릴 때 이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선영 옮김. 320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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