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사기의 메카'로 이름난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지난 20일 역 인근 호텔에 들어서자 로비에서부터 가상자산(코인) 투자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 호텔 카페의 구석 테이블에선 중·노년층 5명이 모인 가운데 투자 설명회가 진행 중이었다. 코인 기반 결제 사업을 하는 글로벌 기업에 투자하면 배당금으로 곧 유명 거래소에 상장되는 A 코인을 지급한다고 했다.
중년 남성 B씨는 "요즘 무분별하게 코인 투자를 하거나 사기 기업에 투자해 돈 잃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다르다"라며 "국가 인증을 받은 합법 회사라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라고 자신했다.
그는 설명 내내 '합법'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했다. "배당금으로 지급되는 A 코인은 7월에 유명 가상자산 거래소에 상장이 확정됐고, 120배 오르기로 약속됐다. 100배만 먹어도 얼마겠냐"라며 웃어 보였다.
기자가 명함을 요구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나도 투자자"라고 했다. 왜 투자자가 투자 유치를 하냐고 묻자 "사람을 데려올 때마다 소개비를 조금씩 받긴 하는데 다단계는 절대로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그가 "100배 이상 오른다"라고 단언한 A 코인은 국내에 상장되지 않은 알트코인도 찾아볼 수 있는 가상자산 정보업체 코인마켓캡이나 코인게코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코인이었다.
올해 들어 가상자산 시장의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됐지만, 선릉역 일대에서는 아직도 코인이나 블록체인 기술을 미끼로 실체 없는 사업이나 자산에 투자를 권유하는 설명회가 한창이었다.
지난 19∼20일 기자가 찾은 선릉역 인근 호텔, 카페, 빌딩, 공유오피스에서는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고령의 청중을 모아놓고 비상장 코인 등에 투자를 권유하는 설명회가 활황을 이뤘다.
미끼로 내건 기업 형태는 가상자산 거래소부터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까지 다양했지만 고수익을 약속하며 큰돈을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다단계식 영업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그럴듯한 사업 소개 프레젠테이션(PPT)을 준비했고, 노년의 청중이 알아듣기 힘든 가상자산 업계 용어를 섞어 쓰며 정부나 대기업과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투자설명회가 열리는 선릉역 인근의 한 건물 앞에는 '불법 다단계·금융 사기를 주의하라'라는 입간판이 세워졌지만,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서는 노인들의 시선이 머물지는 않았다.
선릉역 일대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가상자산을 미끼로 한 사기 행각이 이어지면서 한 해 집계되는 피해 규모는 수천억원에 이르는 상황이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가상자산 불법행위 피해액은 4천430억원, 피해자 수는 4천58명에 달했다.
특히 불법행위 유형 중에서는 투자사기(검거건수 3천105건, 검거인원 1천474건)와 유사수신·다단계(252건, 187명)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고령층의 노후자금을 노리는 사기 일당이 새로운 투자 자산으로 떠오른 가상자산과 부촌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강남구 일대에 대한 기대감을 범행에 이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가상자산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막연한 개념이기에 효과적인 사기 수단이 된다"며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짜 정보에 현혹되기 더 쉬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su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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