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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인터뷰]'센터백→제1골키퍼' 서른한살 윤영글, 다시 꿈꾸기 시작하다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8-04-10 18:32



중학교 1학년, 축구선수의 길에 들어선 소녀는 중학교 3학년 때 골키퍼가 됐다. 남다른 재능으로 17세 이하 대표팀에 뽑혔다. 19세, 20세 이하 대표팀에선 수비수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2010년 서울시청 3년차 때 무릎 수술은 최대 시련이었다. 필드플레이어로 더 이상 뛰기 힘들다고 했다. 다시 골키퍼가 됐다. 행복하지 않았다. 달리고 싶은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수원시설관리공단 이적 후 그녀는 다시 수비수로 돌아갔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골키퍼의 운명이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수문장들의 줄이탈 속에 결국 2013년, 만 스물여섯에 다시 골키퍼 장갑을 꼈다. 2015년 키프로스컵 스코틀랜드전에서 '늦깎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15년 캐나다월드컵, 그녀는 김정미, 전민경에 이은 '서드 골키퍼'였다. 2016년 한국나이 서른, 앞이 보이지 않는 축구의 길을 내려놓으려던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길이 열렸다. 2017년, WK리그 경주한수원 창단과 함께 골키퍼 인생이 새로 시작됐다.

1년이 흐른 2018년 4월, 서른한 살의 그녀는 요르단여자축구아시안컵 대한민국의 '제1골키퍼'다. 8일(한국시각) FIFA랭킹 6위 '아시아 최강' 호주의 무차별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한국-호주전 기자석, 외신기자들이 "저 골키퍼, 누구냐?"고 물었다. 0대0, 무실점 무승부를 이끈 후 그녀가 비로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센터백 출신 골키퍼 '윤덕여호의 맏언니 수문장' 윤영글(31·경주한수원) 이야기다.


▶센터백 출신 늦깎이 수문장, 대표팀 제1키퍼가 되다

골키퍼 포지션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2003~2017년까지 A매치 113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축구의 뒷문을 책임진, 걸출한 '제1키퍼' 김정미(34·인천 현대제철)가 건재한 대표팀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라운드에 선다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정미언니 뒤에서 경기하는 걸 지켜보면서 뛰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려놓았고, 대표팀에서 마음이 멀어졌다. 한국나이로 스물일곱, 너무 늦은 나이에 골키퍼를 시작해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더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축구를 그만둬야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2017년, 경주한수원 창단과 함께 대표팀 코치였던 김풍주 골키퍼 코치와 재회하면서 윤영글의 축구인생이 다시 시작됐다. "소속팀에서 좋은 분들과 함께하면서 지난 1년 동안 성장했다. 김풍주 코치님의 영향이 컸다. 내가 대표팀에서 다시 경쟁하길 바라셨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분의 제자로서 선생님의 품격에 걸맞은 선수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도 마음도 달라진 윤영글은 지난 2월 포르투갈 알가르베컵에서 윤덕여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다. 첫 경기인 러시아전을 3대1, 두번째 스웨덴전을 1대1로 막았다. 요르단여자축구아시안컵, 승점이 절실했던 '최강' 호주와의 1차전, '제1의 윤영글'이 골키퍼 장갑을 꼈다.


사진제공=AFC

사진제공=A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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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랭킹 6위 호주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다

요르단아시안컵 호주전은 그녀의 6번째 A매치였다. 알가르베컵 이전까지 2015년 키프로스컵 스코틀랜드전(1대2패), 2016년 중국4개국친선대회 베트남전(5대0승)이 A매치 기록의 전부인 그녀에게 메이저 대회 출전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전 5경기에선 긴장도 했었다. 호주전에선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고 최고참인 내가 긴장하면 안될 것같아 덤덤하게 임하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날 윤영글은 호주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파주NFC, 요르단 현지에서 3주간 정유석 골키퍼코치, 후배 강가애(28·구미스포츠토토), 정보람(27·화천KSPO)과 치열하게 훈련해왔다. 왼발의 정 코치는 매일 세트피스 훈련 때마다 코너킥 전담키커로 나서 강력한 크로스로 선수들을 단련시켰다. 윤영글은 "코치님의 강한 크로스에 익숙해지다보니 막상 호주선수들의 킥은 그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큰 도움이 됐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중앙수비수 출신의 시야와 리딩 능력, 빌드업의 시작점이 되는 킥은 인상적이었다. 전반 한차례, 수비라인의 백패스 실수 때도 윤영글은 박스 앞으로 뛰어나와 안전하게 클리어링 해냈다.

센터백 출신 골키퍼의 최대 장점은 수비라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점이다. 윤영글은 실업 초년 시절, 서울시청에서 김도연과 함께 센터백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었다. 윤영글은 "내가 수비수로 뛰어봤기 때문에 수비 위치를 잘 리드할 수 있다. 수비수들이 호흡이 차오를 때는 힘든 게 바로 보인다. 옆에서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다운시켜주면 도움을 줄 수 있다. 빌드업도 익숙하다. 언니가 뒤에 있어 든든하다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가장 좋다."

FIFA랭킹 6위, 호주전 무실점은 골키퍼로서 뿌듯한 결과다. 지난해 4월 아시안컵 예선 우즈베키스탄전(4대0승) 이후 8경기만의 클린시트다. "호주전 무실점이 목표라고 인터뷰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며 웃었다. "호주전은 호주전으로 끝이다. 이제 목표는 일본전 무실점 승리"라고 했다. "호주전처럼 똘똘 뭉쳐서 무실점 승리로 월드컵 티켓을 확정하고 싶다"고 눈을 빛냈다.

▶서른한살, 두 번째 월드컵을 꿈꾸다

3년전, 캐나다월드컵 현장에서 그녀는 '3번' 골키퍼였다. 김정미, 전민경과 함께 훈련때마다 성실히 땀을 흘렸고, 매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봤다. 첫 월드컵의 기억을 묻자 "벤치에서 경기를 보는 것만도 꿈같았다.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다. 팀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감도 생겼다"고 답했다. 2019 프랑스월드컵 티켓이 걸린 요르단에서 그녀는 '1번' 골키퍼로 뛰고 있다. '대한민국 제1키퍼'를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윤영글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하지 못했다. (김)정미언니 없는 대표팀을 생각한 적이 없다. 축구하는 동안 대표팀에서 선발로 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해봤다." 한때 포기할 뻔했던 축구가 다시 손을 잡아주었다. "올해 초, 대표팀에 다시 들어오게 되면서 내년 월드컵을 처음으로 상상해봤다. 그냥 울컥하더라"고 털어놨다.

"아직 '넘버1'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가애, (정)보람이 등 후배들도 정말 잘해주고 있다. 우리 팀은 분위기가 정말 좋다. 우리는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믿는다"며 웃었다.

골키퍼와 수비수를 오가며 시련과 좌절속에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가 다시 월드컵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영글'이란 이름은 딸이 단단하고 꽉 차게 영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신 한글이름이다. 서른한 살 골키퍼, 윤영글의 꿈이 알알이 영글고 있다.
암만(요르단)=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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