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스포츠조선 고재완 기자] "사실 2사까지 왔을 때는 나도 접었었다. '오늘은 또 이렇게 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볼넷이 나오더라."
전날의 짜릿한 대역전극 여운이 가시지 않은 5일 고척스카이돔. LG 트윈스 염경엽 감독이 취재진과 0-4의 열세를 뒤집었던 4일 키움전 8회초 상황을 돌이키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승부사의 치밀한 계산과 팬들의 함성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반전 드라마였다.
하이라이트는 8회초 2사 만루, 캡틴 오지환 타석에서 터져 나온 '대타 이재원' 카드였다. 최근 타격감이 떨어진 주전 유격수 대신 '미완의 대기' 거포를 내세운 것은 염 감독의 정교한 심리전이었다.
염 감독은 "이재원을 대타로 내놓을 때도 엄청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도 "이재원이 대타로 나가면 상대 투수는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재원이 나오면 팬들이 환호를 크게 한다. 어떤 슈퍼스타가 나온 것보다 환호한다. 우리 팬들이 그렇다. 그리고 재원이에게는 홈런이 있다"고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단순히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고척을 가득 메운 LG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 열기가 2년 차 신인 투수였던 키움 박윤성을 압박할 것이라는 계산이 적중했다. 염 감독은 "이 두 가지 스트레스를 투수가 받으면 볼넷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작전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재원이 타석에 들어서자 박윤성의 제구는 눈에 띄게 흔들렸다. 염 감독은 "초구가 볼이 되면 쉽게 못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2년 차밖에 안 된 박윤성이 제구가 흔들리고 있었다. 만루에서 잘만 쓰면 밀어내기도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안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복기했다.
특히 첫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순간, 염 감독은 승리를 예감했다. "첫 바람은 실투로 한 방 걸리는 게 제일 좋고, 두 번째로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볼넷이었는데 초구에 볼이 나와서 90% 볼넷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니 확실히 상대 투수가 이재원에게 부담을 좀 갖는 것 같더라. 그렇게 되면 나라도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다"라는 것이 염 감독의 설명이다.
결국 이재원이 밀어내기 볼넷을 골라냈고, 이는 키움 마운드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 염 감독은 "어쨌든 한 방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팬들과 함께 만들어낸 볼넷이다"라며 공을 팬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승부처에서 보여준 냉철한 판단력도 돋보였다. 염 감독은 "키움 투수는 2년 차 신인이니까 포볼로 인해서 흔들리고 있는 상태여서 동점만 되면 연장을 가든 어쨌든 불펜은 내가 카드를 훨씬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봤다"며 "'동점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전이 돼서 9회에 마쳤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접으려던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로 바꾼 염경엽 감독의 용병술. 챔피언 LG가 왜 무서운 팀인지를 증명한 하룻밤이었다.
고재완 기자 star77@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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