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근이(형) 힘이 크죠."
넥센 히어로즈 3번-중견수 이택근(32). 올시즌 넥센 돌풍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홈런과 타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5번 강정호가 인터뷰 때마다 꼭 언급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012년 프로야구에서 넥센은 연구대상이다. 이택근, 김병현을 영입한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도 지난해 꼴찌팀이 프로야구판을 뒤흔들고 있다. 2012 프로야구 초중반 최대 충격파라고 할 넥센 열풍, 이른바 '크림슨 타이드(자주색 파도)' 현상이다.
5월 22일 현재 20승1무1패, 승률 5할8푼8리. 1위 SK에 이어 게임차 없이 2위다. 창단 5년째에 도깨비처럼 벌떡 일어나 기존 구단들을 위협하는 막내 넥센, 그 비밀의 열쇠를 쥔 이가 바로 이택근이다.
타율 2할9푼2리(16위), 2홈런(공동 23위), 18타점(17위), 25득점(공동 3위), 7도루(공동 10위). 결승타 4개(1위). 사실 지금까지 성적만 놓고보면 만능 플레이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최고의 선수라고 하기엔 기록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택근은 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는 선수이다. 장내-외에서 기록 이외의 그 무엇으로 팀을 움직이고 있는 선수가 이택근이다.
지난 겨울 넥센이 2010년 LG로 트레이드한 이택근과 4년 간 총액 50억원에 계약을 했을 때 모두가 놀랐다. 거금을 던진 주체가 다른 팀도 아닌 넥센이라는 데 우선 놀랐고, 50억원이라는 몸값이 매겨진 선수가 이택근이라는 데 또 한번 놀랐다. 의외라는 반응이 나올 때마다 넥센 관계자들은 "이택근에게는 성적으로 따질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설명하곤 했다.
22일 잠실 LG전 경기 중 넥센 이택근과 강정호(왼쪽부터)가 경기전 던아웃에서 밝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잠실=조병관기자 rainmaker@sportschosun.com
없던 리더가 생겼다
넥센의 한 코치는 "그라운드 안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택근이의 존재감이 나타난다. 타석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진루타를 치려고 애쓰고, 출루를 해서는 베이스 1개라도 더 가려고 온몸을 던진다. 또 덕아웃에서는 항상 파이팅을 외치며 후배들을 독려한다"고 했다. 젊은 선수, 비교적 덜 알려진 선수가 주축을 이룬 넥센에 가장 필요한 게 팀 리더였는데, 이택근이 이런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야수에게 배트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야구인들은 눈치를 챘을 수도 있지만, 넥센 타자들에게 작은 변화가 있었다. 배트를 보관하는 배트 케이스가 바뀌었다. 이전까지 넥센 선수들은 배트와 글러브 등 장비를 함께 담는 가방을 사용했다. 배트와 장비 보관을 겸한 케이스를 쓰다보면, 장비에 눌려 배트에 생채기가 나기도 한다. 이게 마음에 걸렸던 이택근은 후배들에게 배트 전용 케이스를 사용해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언뜻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프로 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 10년차에 이름난 선수다보니 배트 등 각종 야구 장비 후원이 적지 않다. 이택근은 혼자 챙기지 않는다. 후배들, 특히 연차가 낮은 저연봉 선수들과 나눠 쓴다. 시간이 될 때마다 후배들을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내 거리를 좁힌다.
'쩍벌남' 이택근 따라하기
올시즌 넥센 코칭스태프는 3루수 김민우가 타격폼을 바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타자 김민우는 시즌이 시작된 후인 지난달 중순 갑자기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로 바꿨다. 시즌 중 타격폼 변화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택근의 1년 선배인 김민우는 후배 이택근을 이야기했다. 선수마다 자신만의 타격 스타일이 있는데도 후배 이택근의 좋은 면을 받아들인 것이다. 팀분위기 쇄신 등 정신적인 면 외에 기술적인 분야에서까지 동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투수 시각에서 봤을 때 타자가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선 채 가슴을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오픈스탠스는 메이저리그에서는 흔한 폼이지만, 국내야구에서는 희귀하다. 마해영이 은퇴한 이후 오픈스탠스의 대명사는 누가 뭐래도 이택근이다. 그 트레이드마크를 따라하는 선수가 팀내에 생겼을 정도라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이택근은 넥센 돌풍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 오히려 자신이 후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잘 해주고 있는 후배들이 없었다면,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욕심을 내고, 무리를 했을 것이다. 시너지 효과는 내가 더 받고 있다"고 했다.
이택근을 보라, 우리도 보상받을 수 있다
넥센이 이택근에게 50억원을 투입해 다시 불러들였을 때 메시지는 확실했다. 넥센도 이제 돈을 쓸 줄 안다는 선언문과 같았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고 있던 넥센 선수들에게 이택근 영입은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2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넥센.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택근은 "자꾸 지다보니까 후배들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5,6회까지 뒤지고 있으면 경기를 쉽게 하는 일이 있었다. 넥센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정팀인데 아쉬웠다"고 말한다.
나서는 걸 싫어하는 이택근이 후배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하루 24시간 중 3시간 정도만 집중하자"이다. 물론, 이택근이 말하는 3시간은 야구를 하는 시간이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마음 편하게 생활을 하더라도 경기때 만큼은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자는 것이다.
그럼 이택근에게 야구란 무엇일까. 원론적이면서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더니 "내가 가장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택근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100% 야구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쉬는 것도 결국은 야구를 더 잘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에게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3년 히어로즈의 전신 현대에 입단했을 당시 이택근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당시 현대의 주전 포수는 김동수 현 넥센 배터리코치, 백업포수는 강귀태였다. 어깨 부상으로 송구에 다소 문제가 생기자, 이택근의 타격 능력을 잘 알고 있던 현대 코칭스태프, 프런트는 1루수 전향을 결정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때 이택근은 포수 미트와 1루수 글러브를 모두 챙겨들고 다녀야 했다. 이택근은 더이상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프로 초기 이택근의 별명은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 V'에 따온 '택근 V'였다. 이름에서 따온, 어감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단순한 닉네임이었다. 10년 가까운 시간은 이택근을 해결사 '택근 V'로 만들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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