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안 맞고 피하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됐죠."
13일 잠실구장. SK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LG 김기태 감독이 훈련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향하는 유원상을 불러세웠다. 마침 취재진과 전날 패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 김 감독은 패전투수가 된 유원상에게 "와서 자세히 말해달라"고 농담을 건넸고, 유원상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응수했다.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부담을 주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쿨'하게 상황이 정리됐다.
유원상은 올시즌 LG의 철벽 불펜이다. 12일 잠실 SK전에서 5-2로 앞선 8회 등판해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4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지만, 이날 경기 전까진 30경기서 2승1패 3세이브 11홀드에 평균자책점 1.10을 기록중이었다. 마무리 봉중근 바로 앞에 나오는 셋업맨으로서, 봉중근의 등판이 불가능한 시점엔 직접 마무리로도 나서면서 순수 불펜투수 중 가장 많은 이닝(36⅔이닝)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올시즌 확 달라진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시 과거의 '볼-볼' 하던 그 유원상이었다. 유원상은 올시즌 직구-슬라이더의 투피치 투수로서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40㎞대 중후반의 묵직한 직구를 기본으로 140㎞를 넘나드는 고속슬라이더 만으로도 효율적인 승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 유원상에겐 직구가 없었다. 총 19개의 공 중 4개만이 직구였다. 자신감 있게 직구를 스트라이크존 구석으로 꽂던 그 모습이 사라지고, 슬라이더와 커브 만으로 승부하려 했다. 하지만 SK 타자들은 스트라이크존 가까이 들어오는 변화구에 속지 않았고, 비슷하게 들어오면 커트해냈다. 이는 상대가 타이밍을 맞추도록 도와주는 것 밖에 안된다.
경기 전 유원상에게 직구를 많이 던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유원상은 "잘 모르겠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며 입을 열었다. 마운드에서 함께 볼배합을 만들었기에 포수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유원상은 "첫 타자부터 홈런을 맞고 나니, 더이상 안맞고 피하려고만 한 것 같다.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오늘 다시 대기한다"며 웃었다.
김기태 감독은 유원상의 피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투수와 타자가 만나면 투수가 이길 확률이 높다. 물론 직구로 부딪혔을 때 얘기다. 지난 겨울부터 강조한 부분인데 투수는 자기 직구가 통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을 때 변화구로 승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감독은 유원상이 최근 슬로커브를 던지는 데 맛을 들이는 모습을 봤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차라리 잘 됐다. 한 번 무너지는 경험도 해야 한다. 금세 좋아질 것"이라고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지난 겨울 유원상의 보직 전환을 이끈 차명석 투수코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차 코치는 "투수에게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특별히 안 좋았다기 보다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수에게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돌파구가 있냐는 질문에는 "어떤 공을 던져도 맞는다면, 피하지 말고 스트라이크존에 넣어서 부딪히면 된다. 그걸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 김 감독과 비슷한 견해였다.
유원상은 김 감독에게 "이번 달에 줄 점수는 어제 모두 줬다"고 말했다. 이 한 마디에 둘 모두 웃을 수 있었다. 투수에게 직구가 최고의 무기라는 것, 굳이 코칭스태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본인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새긴 것 같았다.
잠실=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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