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아들레르 공항은 전쟁터였다.
한국과 일본 등 100여명의 취재진이 1시간 전부터 자리싸움을 위해 진을 쳤다. 급기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포토라인까지 설치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피겨여왕'의 입성에 소치가 요란했다. 김연아(24)가 13일(이하 한국시각)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할 결전지인 러시아 소치 땅을 밟았다.
긴 비행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와 관심은 부담이 됐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진 말은 "부담스러워", 혼자 되뇌이는 말이었다. 피겨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김연아가 탄생한 것은 기적이다. 전세계가 한국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이같은 스포트라이트를 쏟아낸 것은 전무후무하다.
소치와의 첫 만남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언제 이 날이 올까 기다렸다. 드디어 소치에 오게됐다. 일주일이 길 것 같은 느낌이 벌써부터 든다. 남은 시간 컨디션을 잘 조절해 베스트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올림픽이다. 4년 전 밴쿠버는 '여왕의 대관식'이었다. 쇼트프로그램(78.50점)과 프리스케이팅(150.06점) 모두 역대 최고점 기록을 경신하며 총점 228.56점의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바뀐 것은 없다. 김연아는 "그 때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다. 준비를 열심히 한 만큼 후회는 없다. 준비한 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컨트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연아의 대명사는 '강심장'이다. 하지만 그녀도 긴장된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측할 수 없다. '지독한 연습벌레'답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훈련 뿐이다. 김연아는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하지만 운동은 매번 잘할 수 없다. 경기 당일 베스트로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일찍와서 현지적응을 빨리하는 만큼 한국에서 훈련으로 얻은 것들을 펼칠 수 있도록 하겠다. 잘 적응하겠다"고 다짐했다.
여자 싱글은 20일 쇼트프로그램, 21일 프리스케이팅이 펼쳐진다. 시간이 남았다. 김연아는 이날 오후 본격적인 현지 적응에 들어갈 예정이다.
'러시아 샛볕'의 바람이 심상찮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 소치의 대세는 이견이 없었다. 김연아였다. 하지만 피겨 단체전 이후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16세 신예 율리야 리프니츠카야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분위기다. 리프니츠카야는 9일과 10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피겨 단체전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 모두 출전, 1위를 차지했다. 리프니츠카야는 쇼트프로그램에서 72.90점, 프리스케이팅에서 141.51점을 받았다. 두 종목을 합치면 200점대인 214.42점이었다. 개최국 러시아는 홈이점을 앞세워 리프니츠카야의 금메달을 바라고 있다. 김연아의 라이벌로 각인된 아사다 마오(일본)는 쇼트프로그램에서 64.07점, 3위에 그쳐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김연아는 의식하지 않았다. 의식할 수록 독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대회든 금메달, 은메달을 누가 받을 지 예상하는 얘기가 있다. 선수들도 인간이라 그런 부분이 신경 쓰이겠지만 떨쳐버리고 내가 준비한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 뿐이다. 결국 경기는 그 날의 운이다. 운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최선을 다한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겠다." 미소가 흘렀다.
김연아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 카타리나 비트(독일·1984∼1988년) 이후 26년 만의 여자 싱글 2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다. 물론 그 생각도 머릿속에서는 지웠다. 마지막 은퇴 무대라는 현실도 소치에서는 부정하기로 했다.
"마지막 경기라 생각하면 흐트러지고 집중을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다른 경기와 다름 없이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다. 육체는 최선을 다해 후회는 없다. 실전의 날에 긴장하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자신감이 있었다.
최선, 후회, 긴장, 적응, 베스트…. 그녀의 입에서 반복된 단어들이다. 김연아, 현역 인생의 마지막 문이 열렸다. 그녀가 가는 길이 곧 역사다.
소치(러시아)=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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