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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차원은 그렇게 유망한 선수가 아니었다. 서울체고 재학시절인 2003년 17세 이하 대표팀 소속으로 5경기에 나선 것이 전부였다. 이후 대표팀과는 인연을 쌓지 못했다. 2009년 아주대를 졸업한 뒤 전남에 입단했다. 첫 시즌에는 20경기에 나서 1골-2도움을 넣으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2010년부터 고난이 찾아왔다. 부상이었다. 2010년 여름 훈련 도중 오른발목을 다쳤다.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니었다. 무리한 욕심이 부상을 키웠다. 완전히 회복이 되기 전 훈련을 했다. 다시 부상이 악화되면서 경기에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2010년 내내 8경기 출전에 그쳤다. 자신감도 떨어졌다. 2011년 입대를 선택했다. 군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상주에서 고차원은 다시 날아올랐다. 2011년과 2012년 두시즌동안 상주에서 51경기에 나서며 7골-2도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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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더 힘들었다. 그해 동계훈련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몸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하지만 시즌 시작 직전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이 올라왔다. 절망이었다. 부상 회복에만 한달 반이 걸렸다. 경기 출전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데도 또 다시 한달 반이 걸렸다. 출전 준비를 마쳤을 때 트레이드 소식을 접했다. 수원 임경현과 팀을 맞바꾸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새로운 팀에서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서 감독의 믿음 속에 고차원은 재활에만 전념했다. 2013년 시즌을 날려버릴만큼 오래 걸렸다. 그래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서 감독의 말을 믿고 자기 몸에만 집중했다. 여기에 자신이 부활해야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2012년 12월 결혼한 아내 박현수씨와의 사이에 사랑의 결실이 찾아왔다. 소중한 딸이었다. 이제까지 기다려준 아내 그리고 새로 태어날 딸에게 멋진 남편이자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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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차원은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25경기에 출전했다. 22경기가 선발 출전이었다. 포항이나 전북, 울산, 서울같은 강팀을 상대할 때 중용됐다. 화려한 발재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패싱 조율 능력이 뛰어나고 활동량이 넓다. 수비력도 일품이다. 수원의 2위 확정에 큰 힘이 됐다. 수원팬들은 고차원에 대해 '수원의 박지성'이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우곤 한다. 서 감독은 "언제나 제 몫을 해주는 선수다. 우리팀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고 평가했다 .그런 찬사들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경기에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차원은 경기 출전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