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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으로 또 무대 오른 성폭력 가해자 창작극…피해자들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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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 창작물 배제' 규정에 허점…2차 피해 부른 문화 행정
연출자만 다를 뿐 가해자 것과 다름없어…"규정 개정해야" 질타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성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강원지역 문화예술인이 수년 전 창작한 아동극이 올해 전문예술지원 사업으로 뽑혀 최근 또다시 무대에 오른 일이 벌어져 2차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범죄에 연루된 예술인이 속한 단체는 전문예술지원 사업 제외 대상임에도 문제의 예술인이 단체를 탈퇴해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뽑힌 건 '성범죄자의 창작물을 배제'하려는 규정의 취지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14일 문화예술계에 따르면 지난 1일 춘천인형극장 대공연장 무대에 한 아동극이 올랐다. 강원문화재단의 2025년도 전문예술지원사업에 지난 6월 추가로 뽑힌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도내 한 예술단체의 전 대표이자 예술 감독직을 맡았던 A씨가 수년 전 창작했다. A씨는 단원들을 2017년부터 2022년까지 7차례에 걸쳐 추행한 혐의로 지난 7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됐다.
A씨는 단체를 탈퇴하고 예술 감독직까지 내려놓았으나 해당 작품은 연출자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전의 제목과 내용 그대로 또다시 문화재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대에 올랐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은 경악했다.
전문예술지원사업 공모 규정상 성범죄로 처벌받은 예술인 또는 처벌 전력이 있는 예술인이 구성원에 포함된 단체, 성희롱·성폭력 등 사유로 기소 중이거나 형 집행 중인 단체나 예술인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됨에도 뽑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원문화재단은 바뀐 연출자의 이름만 보고 해당 작품의 원작자가 A씨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A씨가 성범죄로 재판받다가 실형을 받은 사실 역시 몰랐다.
이에 여성 인권 운동단체인 춘천여성민우회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으나 선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단체 대표와 연출자가 A씨가 아닌 데다, A씨가 단체를 탈퇴한 상태에서 이뤄진 공모 신청이었으므로 결격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단체 대표와 연출자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 A씨가 창작한 극본 그대로 공연된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또다시 이런 상황이 재발할 우려가 있어 2차 가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부 대사 수정이나 변경이 있더라도, 극본의 저작권과 창작자가 A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규정상 공연 자체가 가능하더라도, 공공 지원금이 투입되는 사업이라면 성폭력 범죄로 재판받는 예술인이 원작자인 작품이 지원받는 것이 적절한지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춘천여성민우회 관계자는 "연출자가 바뀌었다고 해도 공연의 핵심은 극본이며 작품이 무대에 오를수록 원작자에게도 명예와 실질적 이익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연출만 다르니 문제없다'는 식의 접근은 성범죄자의 창작물을 배제하고자 한 규정의 취지와 피해자 보호, 사회적 신뢰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단체라면 자중하고 다른 작품을 제출하는 등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며 "폐쇄적인 문화예술계 특성상 성범죄 피해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 두터운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규정상의 허점과 윤리적인 문제는 최근 행정사무감사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임미선 강원특별자치도의원(비례·국민의힘)은 전날 강원문화재단 행정사무감사에서 "판결 선고가 난 뒤에 사건을 인지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형사고소부터 재판으로 이어진 시간 흐름을 보면 재단에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던 사안"이라며 재단의 대처를 지적했다.
임 의원은 "예술단체의 이력과 대표자 변경 이력 등을 철저히 검증해 중대한 문제가 확인되면 지원을 배제·중단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해 공모 선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강화하고, 피해자 지원 대책을 강구하라"고 주문했다.
이승진(비례·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이날 문화체육국 행정사무감사에서 "선정 당시 A씨가 퇴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체에 대한 지원 유지 결정을 도민들이 이해할지 의문"이라며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 대표가 단체에 대해 가지는 책임성을 고려하면 이번 지원 유지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이어 "여전히 해당 단체에서는 A씨의 가족과 관계자들이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관계성·연속성이 있는 단체에 대해 사실관계와 현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채 관련 지침만으로 판단한 것은 문제"라며 조속한 개정을 촉구했다.

conanys@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