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아도 영상으로 녹화한 진술을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옛 성폭력처벌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재는 26일 영상물에 수록된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 특례를 규정한 옛 성폭력처벌법 30조 6항 관련 부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4(합헌)대 5(위헌) 의견으로, 위헌 의견이 합헌 견해보다 많았지만 위헌 정족수(6명)에 미치지 못해 '가까스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사건의 쟁점은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 진술에 대해 피고인의 반대신문 없이 피해자 신뢰관계인의 진정성립만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도록 한 것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는지였다.
진정성립이란 수사·조사 때 조서에 적은 내용이 자신이 진술한 대로 작성됐음을 의미한다.
위헌심판을 제청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한 피고인 A씨는 위력으로 지적장애 3급인 피해자 B(10)양을 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2022년 2월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A씨는 1심 공판에서 진술녹화 CD에 수록된 피해자의 진술을 증거로 쓰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법원은 피해자 조사 과정에서 동석한 신뢰관계인의 법정진술로 진정성립을 인정하고 이를 유죄 판결 증거로 사용했다.
A씨는 항소심 중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고, 항소심 법원인 부산고법은 이를 받아들여 제청했다.
합헌 의견을 낸 김형두·조한창·정계선·마은혁 재판관은 "심판 대상 조항은 장애인 피해자가 법정 진술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정신적 고통과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며 "과도한 신문이나 의사소통의 제약으로 피해자의 진술이 왜곡되거나 불명확해질 위험을 완화해 실체적 진실 발견에 기여하려는 목적도 함께 갖는다"고 설명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장애인 피해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피해자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극도의 위축 상태로 진술의 정확성이 낮아질 우려가 있고,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신문권의 핵심은 '물리적 대면'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진술의 진실성을 검증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가 보장되는지'에 있다고 강조했다. 진술 녹화 영상물이 음성, 말투와 속도 등 비언어적 정보를 포착해 상세한 검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김상환·정정미·정형식·김복형·오영준 재판관은 "피해자의 진술이 유죄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경우 이에 대한 실질적 반대신문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피고인의 방어권이 중대하게 제한될 위험이 있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이들은 "영상물에 수록된 진술은 수사기관의 질문과 피해자의 일방적 진술로 구성된 전문증거(경험자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타인이 전해 들은 말 등 간접적 진술 등의 증거)"라며 "정확성에 오류가 개입될 수 있고, 사후적 검토만으로는 진술의 미묘한 변화나 상호작용을 충분히 포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신문권은 형사 절차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능을 가지므로, 이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형해화할(뼈대만 남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증거보전 절차와 영상중계 신문, 피고인 퇴정 등과 같이 피해자의 부담을 완화하면서도 반대신문권의 본질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적 수단이 존재한다고도 했다.
앞서 헌재는 2021년 12월 같은 조항의 '19세 미만 성폭력 범죄 피해자'에 관한 부분에는 피해자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2023년 성폭력처벌법 개정으로 해당 조항은 삭제됐고, 대신 영상녹화물은 '미성년 및 장애인 피해자가 사망, 외국 거주 등 사유로 출석해 진술할 수 없고, 해당 영상녹화가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음이 증명된 경우'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alrea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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