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굴러, 이X아."
암호도 술주정도 아니다.
지난 2일 달 탐사를 위한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르테미스 2호' 발사 현장을 생중계하던 KBS 공식 유튜브 채널에 자막으로 등장한 단어들이다.
인공지능(AI) 자동 번역이 '로저'(Roger), '롤'(Roll), '피치'(Pitch)를 '로저', '굴러', '이X아'(비속어)로 잘못 번역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해당 단어는 항공·우주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본 교신 용어로 '수신 확인'(Roger), '기체의 상하'(Pitch)·'좌우(Roll) 자세를 조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는 8일 xAI의 AI 모델 '그록'을 활용한 자동 번역 기능을 발표했다. 번역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자국어처럼 읽히는 기술력에 "언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환영과 "번역 수준이 너무 낮다"는 불만이 공존한다.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더 이상 인간의 통번역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동시에 오역 등 한계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구촌의 의사소통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 "데이터에 없거나 패턴 벗어나면 오역 가능성 커져"
이동헌 카이스트(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음향 AI 박사는 이번 KBS 오역 사태에 대해 "음성 기반 AI는 '멜 스펙트로그램'(소리의 주파수 정보를 인간의 청각 특성에 맞춰 변환한 시각적 표현 방식)이라는 특징을 기반으로 음절을 분석하는데, 무성음인 'P'와 유성음인 'B'는 발음 원리가 유사해 사람의 성대 사용 유무에 따라 데이터가 비슷하게 추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AI가 'Pitch'를 'Bitch'(비속어)로 물리적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송연석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번역전공 주임교수는 "사람이었다면 설령 음성을 잘못 들었어도 우주선 발사라는 상황과 'Roll'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Pitch'로 유추하거나, 공중파 방송의 윤리 규범을 고려해 '눈치껏' 순화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앞서 작년 1월에는 한 언론의 영문뉴스 사이트에서 '가자(Gaza) 지구'를 '렛츠 고'(Let's go: 가자)로, '물의'를 '워터 인텐션'(water intention: 물의 의도)으로 번역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같은 해 7월에는 메타의 자동번역 기능이 인도의 한 주지사가 여배우의 사망을 애도하며 올린 추모 글을 "주지사가 사망했다"로 오역해 메타가 사과했다.
이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전 독일어통번역학과 교수)는 "전문 용어가 다량 포함된 분야나 공적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에는 AI 번역이 문자적 해석에 머물러 오역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송 교수 역시 "학습된 과거 데이터와 기존 패턴에 의존하는 AI의 특성상, 데이터에 없었거나 패턴을 벗어나는 창의적인 신조어, 혹은 상황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는 중의적 표현 앞에서 오역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어의 일상적 표현인 '여기 자리 있어요'를 예로 들며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빈자리이니 앉으라'는 뜻일 수도, '주인이 있는 자리이니 앉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는데, 실제 상황과 화자의 의도를 모르면 판단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생성형 AI가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더라도 실제 상황에서는 어색한 번역을 내놓는 한계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AI 번역의 확산 속도는 빠르다.
지난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2025년 인터넷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6세 이상 인구의 AI 서비스 경험률은 67%에 달한다. 특히 '외국어 번역' 분야 이용률은 전년 대비 11%포인트 이상 증가한 40%를 기록했다.
기술 적용 범위도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구글은 화상회의 서비스 '미트'(Meet)에서 실시간 음성 번역 기능을 확대하고 있고, 줌과 딥엘도 회의·웨비나용 라이브 번역 자막 서비스를 앞세워 기업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 "아직 사람의 검수 필요…최종 책임자로서의 역할 커질 것"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가 2023년 3월 실시한 온라인 조사에서 생성형 AI의 대체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군 1위로 '번역가·통역가'가 꼽혔다. 응답자의 90.9%가 대체 가능성이 크다고 답해, 10개 직업군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다만 아직 현장의 진단은 통역사·번역가의 '소멸'이 아닌 '재편'에 가깝다.
카이스트 이 박사는 "상황이 비교적 고정된 발표, 회의, 안내처럼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는 AI 번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서도 "농담이나 언어유희, 재판처럼 한 문장의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거나 결과가 중대한 장면은 아직 사람의 검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번역가와 검수자의 역할이 지금보다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높지만, 사투리나 불분명한 발음처럼 사람끼리도 놓치는 음성은 AI도 100%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렵다"며 "비용과 속도를 고려해 AI가 널리 쓰이겠지만, 완전한 대체와는 다른 문제"라고 내다봤다.
송 교수는 "정형화된 문서는 AI가 초안을 만들고 사람이 이를 검토·수정하는 방식이 이미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며 "앞으로 번역가는 단순 생산자보다 품질관리자, 평가자, 최종 책임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업계에서는 '기계번역 사후 편집'(MTPE·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이 널리 활용된다. 번역 지원 도구(CAT tool)에 탑재된 AI 번역으로 초벌 번역본을 만든 뒤, 사람이 용어를 통일하고 누락이나 왜곡을 바로잡는 식이다.
이 교수는 "법률 계약서, 의료 기록, 항공·우주 기술 문서, 방송 뉴스와 공공 안내처럼 전문 지식과 사회적 책임이 함께 요구되는 영역은 끝까지 인간 번역가의 판단이 필요할 것"이라며 "AI 시스템을 특정 분야에 맞게 훈련하고 품질 관리 체계를 설계하는 일 역시 번역가의 새로운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봤다.
◇ 대학 커리큘럼 개편…"AI번역 평가 역량 키워"
변화는 교육에도 반영된다.
서울의 한 대학교 불어불문학과 20학번인 유모(25) 씨는 17일 "창업을 위해 2년간 휴학했다가 올해 복학하니 교수님이 'AI 사용을 막을 수는 없다'며 활용을 허용했다"며 "각자 번역 결과를 공유한 뒤 어떤 표현이 원문의 뉘앙스에 더 가까운지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에는 AI를 쓰면 번역 수업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며 "시중에 나온 문학 번역서도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번역에는 완벽한 정답이 없고 더 나은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은 공통 필수 과목으로 '통번역과 AI'를 두고 있다. 거대언어모델(LLM), 자연어처리(컴퓨터가 사람 언어를 다루는 기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AI에서 원하는 답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설계하는 방법)의 기초부터, AI 번역·AI 통역의 원리 등을 다룬다.
성균관대도 작년부터 기존 번역·테솔대학원을 '언어·AI대학원'으로 개편해 운영하고 있다. 번역학과 영어교육의 기반 위에 프로그래밍, 데이터 분석, 자연어처리 등 AI 관련 교육을 결합해 언어 능력과 기술 이해를 함께 갖춘 인재를 키우겠다고 설명한다.
송 교수는 "예전에는 번역한 결과물 중심으로 수업이 이뤄졌다면 이제는 AI 번역을 평가·감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비판적 사고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minj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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