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올림픽종목에서 빠지지 않았다면 런던 무대에 함께 섰을 수도 있었다. 야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올림픽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장에서 함께 할 수 없다. 시즌 중이라 런던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아끼는 동생'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형들을 잊지 않았다. 이역만리 런던에서 한국에 있는 형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영상 통화까지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입성한 런던에서 설레는 마음을 전화기를 통해 고스란히 정했다. 자주 보지 못하지만 항상 보고 싶은 얼굴이었기에 휴대폰 번호를 바로 눌렀다. 형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4년전 은메달의 아쉬움을 씻기 위해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에 도전하는 동생 왕기춘(24·포항시청)에게 힘을 실어줬다. 자주 통화하는 사이지만 그땐 낯간지러워 하지 못했던 말들도 꺼냈다. 종목을 넘어선 사나이들의 진한 우정.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 강영식과 외야수 김주찬(이상 31)이 왕기춘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From 강영식
2009년 폭행시비에 휘말린 왕기춘은 자신의 인터넷 팬 카페에 글을 남겼다. "앞으로 매트에 서는 제 모습을 못 볼듯합니다. 태어나 처음 포기라는 걸 해봅니다." 은퇴를 암시하는 글이었다. 괴로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전화기를 꺼놓은 채 잠적했다. 그리고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롯데 강영식의 집이었다. 강영식은 시선을 피해 부산에 온 왕기춘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눈앞에 아끼는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평소 무뚝뚝한 그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도망왔냐?" 단 한마디로 끝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뒤 형제만큼 친해진 강영식과 왕기춘은 10일간의 짧은 동거로 더욱 끈끈한 우정을 나눴다. 강영식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평소에 기춘이가 힘들어도 내색을 안한다. 그날도 애써 감정을 숨기려 하기에 나도 평소대로 지냈다. 맛있는 것을 많이 사줬다. 이후에도 기춘이는 훈련이 힘들면 당일치기로 부산에 내려와서 얘기를 나누고 가곤 했다." 강영식과 왕기춘이 친해지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냥 통하는 게 많았다"는 게 이들 우정의 시발점이다. 왕기춘은 2010년 강영식의 결혼식에 사회자로 나서 우정을 과시했다. 2년이 흐른 뒤, 이제 다시 강영식이 동생에게 힘을 불어 넣어줄 때다. 그는 "너의 금메달을 간절히 바란다. 네가 금의환향하면 내가 무엇을 못해주겠냐. 금메달 따고 오면 같이 여행가자고 했지? 시즌 끝나면 같이 해외여행 가서 다시 회포를 풀자"고 했다. 느낌이 좋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춘이 경기가 한국시간으로 월요일 오전에 열리는데 야구는 유일하게 월요일에 경기가 없다. 내가 새벽에 TV로 응원할 수 있으니 꼭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사랑한다 기춘아."
From.김주찬
절친 강영식을 통해 왕기춘을 소개 받았다. 왕기춘이 강영식 집에 머물때 함께 식사를 하며 쌓은 우정이 어느덧 3년. 김주찬은 왕기춘의 '운동에 대한 열정'을 보고 정이 갔단다. 성격은 정반대다. 김주찬은 말도 없고 무뚝뚝하다. 반면 왕기춘은 형들에게 먼저 다가가 마음을 터놓는다. 반대의 성격이지만 '야구'라는 공통 주제로 금세 친한 친구가 됐다. 형들 몰래 사직구장에서 야구를 보고 가는 동생이 고맙기만 하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동생 기춘아. 내가 떠나기 전 한 말 꼭 기억해라. '금메달 못 따면 돌아오지 마.'" 김주찬이 보낸 응원의 메시지는 협박(?)으로 시작됐다. "하하. 너 긴장 풀어주려고 한 농담이다"며 수습했지만 금메달을 따길 바라는 마음은 굴뚝같다. "태릉선수촌의 지옥훈련을 온 몸으로 견디며 세계정상의 기량을 쌓은 너의 노력과 끈기에 항상 감탄하고 있다. 난 의심하지 않는다. 너는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졌다. 하지만 참 안타까웠다. 베이징 때도 그랬고 세계선수권 때도 은메달에 머물렀어. 마치 정상등극의 기회를 신이 외면한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형은 항상 다치지만 말고 너의 기량만 충분히 발휘해 달라고 마음에 새기면서 바라고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금메달은 너의 것이니까. 정말 이번에는 땄으면 좋겠다. 금메달."
김주찬은 무뚝뚝해서 애정표현에 약했다고 했다. 그런데 왕기춘이 런던에 잘 도착했다고 메시지가 온 것을 보고 마음이 뭉클했다. 용기를 냈다. "네가 시간을 내서 야구 관람올 때 항상 고마웠다. 내가 말이 없고 무뚝뚝해서 표현 잘 못하지만 이제는 말할께. 항상 고맙다. 런던에서 부담 없이 기량을 펼친다면 충분할 거야. 런던이 너에게 축복의 땅이 될 수 있기를."
9월 13일 그리고 약속
왕기춘은 런던으로 떠나기 전 잠깐 올림픽 이후를 그려봤다. 자신의 생일인 9월 13일을 떠 올렸다. "이번에 금메달을 따면 내 생일에 정말 친한 사람들 다 불러 모아서 놀러가고 싶다. 영식이형 주찬이형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시즌 중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금메달 및 생일 선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고 했다. 런던에 다녀온 뒤 얘기하겠다고 했지만 한 가지 힌트는 줬다. "형. 사직구장에 서보면 어때요?"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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