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 재키 로빈슨이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었다면, 행크 애런은 인종 간 능력에도 차별이 없다는 걸 증명했다.
1974년 봄 메이저리그는 새로운 홈런왕 탄생이 임박하자 극단적으로 술렁거렸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이자 백인의 우상인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한 흑인 타자가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런은 그해 4월 10일(한국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애틀랜타스타디움에서 열린 LA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좌완 알 다우닝의 가운데 높은 직구를 잡아당겨 좌중간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아치를 그리며 개인통산 715호 홈런을 달성했다. 루스가 39년간 갖고 있던 역대 홈런 기록(714개)을 경신한 것이다.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빈 스컬리는 홈런이 터져 나오자 "높은 직구를 친 것이 높이 날아가 넘어갑니다"라고 외친 뒤 25초 동안 코멘트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스컬리는 애런이 홈플레이트 밟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자 "야구사에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인가, 애틀랜타에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인가, 조지아주에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인가, 이 나라에 이 세계에 얼마나 경기로운 순간인가. 한 흑인 남성이 백인들의 우상이 갖고 있던 기록을 깨고 남부 지역(Deep South)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고 했다. 조지아주는 흑인 차별이 심한 지역 중 하나였기에 스컬리는 'Deep South'라는 말로 애런의 홈런 기록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AP는 지난 23일 애런이 타계한 소식을 전하며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깰 때 인종주의자들의 위협을 절제된 품위로 견뎌낸 애런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타전했다.
애런은 루스의 기록에 접근해 가던 그해 4월 초부터 엄청난 협박에 시달렸다. 미국 전역에서 협박 편지가 날아드는가 하면 경기장에서도 백인들의 야유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미국 남부 앨라바마 모빌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해 니그로리그에서 겨우 직업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다.
애런은 니그로리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쳐 1952년 보스턴 브레이브스(애틀랜타 전신)와 계약하면서 비로소 주류에 합류했다. 195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애런이 첫 홈런왕을 차지한 건 1957년이다. 그해 타율 3할2푼2리, 44홈런, 132타점으로 홈런-타점왕을 차지하며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됐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1년 연속 올스타에 뽑힌 그는 통산 4번의 홈런왕과 4번의 타점왕을 차지했고, 홈런 말고도 통산 타점 2297개도 1위의 기록이다. 애런의 타격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 1999년부터 양 리그 최고의 타자에게 수여하는 행크 애런상(The Hank Aaron Award)이다.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이날 성명을 통해 "행크 애런은 모든 사람들이 꼽는 역대 최고의 선수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는 선수로 쌓은 기념비적 성취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진실성이 더 돋보였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가장 잘 상징했다. 그의 인생은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역사를 바꾸고 특별하게 빛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라며 찬사를 보냈다. 약물은 꿈도 꾸지 못한 시절 20년 넘게 거포로서 꾸준한 활약을 펼친 그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한 번도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다.
애런은 애틀랜타 구단에서 일하던 1982년 8월 마이너리그 팀을 이끌고 방한한 적이 있다. 그는 잠실구장에서 국내 팀들과 친선전을 치르며 홈런 레이스, 사인회, 타격 지도 등 이벤트를 벌였는데 팬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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