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지천명 아이돌' 배우 설경구(53)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루고 미뤘던 숙제를 끝낸 그는 이번에도 파격적인 도전과 새로운 변신으로 다시 한번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전매특허 '브로맨스'는 덤, 특유의 무심함과 반전의 따뜻함으로 무장한 설경구가 새로운 인생 캐릭터로 의미 있는 필모그래피를 추가했다.
사극 영화 '자산어보'(이준익 감독, 씨네월드 제작)에서 흑산도로 유배된 후 바다 생물에 눈을 뜬 학자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그가 25일 오전 스포츠조선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자산어보'에 대한 비하인드 에피소드와 근황을 전했다.
'자산어보'는 실학자 정약용의 형이자 멘토였던 정약전이 유배 생활 중이었던 1814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을 기록해 만든 어보(魚譜)의 서문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진정한 벗의 우정을 나눈 정약전과 창대의 교감은 물론 '자산어보'가 탄생한 아름다운 흑산도 바다의 풍경까지 수묵화 같은 흑백의 묵직한 힘으로 담아내 특별한 울림을 선사한다.
특히 '자산어보'는 '실미도'(03, 강우석 감독)로 '한국 최초 1000만 배우' 타이틀을 꿰차고 이후 '해운대'(09, 윤제균 감독) '감시자들'(13, 조의석·김병서 감독)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17, 변성현 감독) '살인자의 기억법'(17, 원신연 감독) 등을 통해 장르를 불문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인 '연기 신(神)' 설경구가 1993년 데뷔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사극 연기에 도전해 많은 화제를 모았다.
'자산어보'에서 동생 정약용(류승룡)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따른 죄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머나먼 섬 흑산도로 유배당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그는 육지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바다 생물과 섬마을 주민들의 일상을 보며 유배길에 잃었던 호기심을 되찾고 또 글공부에 한계를 느끼는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를 만나면서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 인물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히 표현해 영화 속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원'(13) 이후 8년 만에 이준익 감독과 재회한 설경구는 '자산어보'로 다시 한번 환상의 케미스트리를 과시, 새로운 인생작을 경신하는 데 성공했다.
8년 만에 재회한 이준익 감독의 설득으로 '자산어보'를 선택하게 됐다는 설경구는 "'소원'이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걸 이준익 감독과 같이 해봤다는 게 좋았다. 그때 현장에서 이준익 감독을 겪으면서 놀랐던 지점이 있었다. 내가 감정을 무겁게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이준익 감독은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걸 싫어해서 다른 분위기로 이끌더라"며 "그동안 사극 기회가 있었는데 안 해봤던 것도 사실이다. 용기가 안 나기도 했고 미루다 미뤄서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이준익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은 배우들의 장점을 이야기 많이 해준다. 한번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 옷과 수염, 갓을 쓰고 나타났는데 그럼에도 '너무 잘 어울린다'라며 칭찬해주셨다. 그 칭찬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 이준익 감독과 하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나의 낯선 모습에도 자유로워지더라"고 밝혔다.
28년 만에 첫 사극을 도전하기까지 그는 "왠지 사극을 조금씩 미루고 싶었다. 미루면서도 해야겠다 생각을 하긴 했다. 안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겠다. 구체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낯선 나의 모습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내게 제안이 들어온 사극 작품 중 개봉한 작품도 있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 작품을 개봉 이후 봐도 '내가 저 작품을 할걸'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들더라. 사극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자산어보'를 하면서 달라졌다. 이번 기회에 흑백 사극 영화를 했으니 다음에는 컬러로 사극 영화를 다시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한두 번 더 해보고 싶어졌다"고 애정을 전했다.
설경구는 올해 '자산어보' 외에도 '킹메이커'(변성현 감독) '야차'(나현 감독) '소년들'(정지영 감독) '유령'(이해영 감독)까지 4편의 영화를 선보일 계획이다. 그야말로 쉼 없이 작품을 이어가며 열일하는 그는 "나의 에너지 원천은 늘 반복되는 일을 안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촬영장이지만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궁금증과 걱정, 또 기대와 설렘이 나를 팔딱팔딱 뛰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며 "원래 촬영할 때 굉장히 일찍 일어난다. 촬영할 때 오전 7시 콜이면 오전 3시에 일어난다. 뭘 준비하는 건 아니고 땀을 쫙 빼려고 한다. 새로운 걸 맞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참 지겨운 걸 꽤 오래 반복하는데 그게 지겹지 않은 게 내가 맡은 배역의 호기심, 설렘이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줄넘기로 땀을 빼는 편이다. 변요한이 1000번 정도 한다고 했는데 두 시간 정도 줄넘기를 한다. 1000번은 10분이면 끝난다. '공공의 적'(02, 강우석 감독) 끝나고 살이 90kg까지 쪘다. 다음 작품인 '오아시스'(02, 이창동 감독) 캐릭터를 위해 억지로 살을 뺐는데, 그때 촬영장 숙소에서 줄넘기로 살을 뺐다. 그게 지금까지 습관이 됐다.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갔을 때도 줄넘기를 가지고 갔다. 토론토영화제 때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더라. 그래서 화장실에 하기도 했고 이제는 줄넘기가 필수품이 됐다. 줄넘기를 안 하고 촬영장에 가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고 가야 한다"고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냉정한 설경구지만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좋은 형'으로 정평이 난 설경구. 그래서인지 그에겐 늘 '브로맨스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이번 '자산어보' 역시 변요한과 차진 브로맨스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설경구는 "변요한을 처음 본 것은 '감시자들'(13, 조의석·김병서 감독) 때 첫 촬영 전 상견례 자리에서다. 그때 변요한을 처음 봤다. 내가 그때 무심코 '너 눈이 참 좋다'라는 말을 했다. 그게 첫인상이었고 이후 신을 마주친 적도 없다. 눈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 이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더라. 낯을 굉장히 많이 가린다고 하더라. 성격적으로 나와 비슷했다. 나도 사교적이지 못하고 같이 작업을 해야 친해지는 편이다.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이준익 감독에게 변요한을 추천했던 것 같다. 약전과 접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변요한은 좋은 친구다. 나에게 잘 맞춰주고 사랑하는 동생이자 친구다. 지금도 꾸준히 전화, 문자 한다. 코로나19 시국이라 잘 못 만나지만 가끔 만나 고민도 이야기한다. 아주 좋은 친구 사귄 것 같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는 "'브로맨스 장인'으로서 딱히 비법은 없다. 그냥 현장에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선, 후배를 떠나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서로 어려워하지 않게 다가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변요한이 나를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 아무래도 내가 연식이 있다 보니 어려울 수 있지 않나?"며 "촬영 전 늘 술 한잔하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코로나19 시국 때문에 못 하지만 이전에는 촬영 전 동료들과 술 한잔하면서 대부분 내가 평정을 시켜버린다. 후배들에게는 선배 말고 형으로 부르라고 한다. 일단 그 거리부터 좁히려고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선배라고 해서 후배들에게 모든 부분 귀감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다가가려고 하면 후배도 다가오지 않겠나? 그러면서 만나지는 것 같다. 선, 후배가 아닌 동료로 편해지는 걸 느낀다. 그런 부분을 느끼면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같다. 변요한뿐만 아니라 젊은 배우들과 잘 지내고 있는걸 보면 브로맨스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방식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후배들이 다가와 줘서 오히려 내가 감사한 일이다"고 답했다.
'자산어보' 속 웃음 포인트 중 하나인 가거댁 역의 이정은과 로맨스 호흡도 언급했다. 설경구와 이정은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동문으로 데뷔 전부터 우정을 쌓은 절친한 사이기도 했다. 설경구는 "이정은은 어렸을 때부터 봐서 정말 편한 사이다. 로맨스를 안 친한 배우와 했으면 부끄러웠을 텐데 친해서 그런(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거기에 이준익 감독이 담백하게 담은 것 같다. 일단 이정은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편했다"고 말했다.
또한 '기생충'(19, 봉준호 감독)을 통해 아카데미는 물론 전 세계를 사로잡은 이정은을 향해 "이정은은 너무 늦게 빛을 본 배우인 것 같다. 더 일찍 알려졌어야 했던 배우다. 학교 다닐 때부터 생활 연기의 대가였다. 늘 삶을 즐기고 무엇보다 웃긴 친구였다. 정도 많은데 정확한 부분도 있고 춤도 잘 춘다. 연극 '지하철 1호선' 할 때도 무대를 휘어잡았다. 반가운 것은 당연하고 이정은이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너무 늦게 잘 된 것 같다. 그런데 또 되자마자 대형 사고를 쳤다. 역시 이정은이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로맨스 연기에 대한 욕심에 대해 "배우들의 로망은 멜로다. 영화는 멜로다. 지금 한국 영화는 장르 영화가 잘돼 장르 영화만 우르르 나온다. 뼈와 살과 뇌를 빠개는 영화들이 나오는 게 마치 한국 상업 영화의 전체인 것처럼 됐다. 배우로서 멜로영화 하고 싶다. 그런데 책도 없고 연락도 없다"고 한숨을 쉬어 웃음을 자아냈다.
'자산어보'는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도희 등이 가세했고 '변산' '박열' '동주'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는 31일 개봉한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씨제스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