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박상경 기자] 어느덧 '만년 꼴찌'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한화 이글스.
그들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4전5기'로 일군 1999년 V1의 환희.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지만 여전히 한켠에서 찬란히 빛나는 역사다. 에이스 정민철과 불패의 마무리 구대성, 베테랑의 진가를 보여준 송진우 한용덕의 역투, '만년 2인자' 꼬리표에도 포기하지 않고 팀을 지킨 장종훈 강석천 이정훈 등 레전드들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훌륭한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도 빠질 수 없었다. '원조 출루머신' 제이 데이비스, 한화의 공격적 주루플레이를 이끌었던 댄 로마이어가 주인공. 특히 로마이어는 한화의 우승이 결정된 1999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2-3으로 뒤지고 있던 9회초 동점 3루타를 치고 장종훈의 희생플라이 때 홈 쇄도해 역전 결승점을 만들어내면서 우승에 방점을 찍었다. 한 베이스를 더 뛰는 주루 플레이가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킨 장면. 로마이어는 동료들에게도 당시엔 낯설었던 미국식 타격 및 주루플레이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올 시즌 한화의 리빌딩을 이끌고 있는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공격적 주루플레이다. 꾸준히 점수를 만들고 상대 수비를 흔드는 최고의 무기라는 시각. 이를 위해 한화는 스프링캠프부터 주루플레이에 방점을 찍고 시즌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거듭되는 패배와 추락하는 순위 속에 이런 모습은 어느덧 희석됐던 것도 사실.
후반기 들어 한화의 주루플레이는 다시 깨어나는 모양새다. 외국인 타자 에르난 페레즈가 중심에 서 있다. 중장거리 타격 생산 능력, 멀티 포지션 소화 등 여러 장점이 꼽혔던 선수지만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한 베이스를 더 뛰는 주루 능력이다. 그라운드 바깥에선 직접 구단 용품숍을 찾아 선글라스를 구매, 더그아웃에서 홈런 세리머니용으로 사용하는 등 분위기 메이커 노릇도 톡톡히 하고 있다. 열정적인 플레이와 친화력은 그때 그 시절 로마이어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수베로 감독도 이런 부분을 인정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팀의 베이스러닝 능력은 성장했지만, 등락과 실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페레즈가 합류하던 시점에선 사실 정체된 느낌도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페레즈가 미국에서 플레이하던 스타일이 팀 전체에 에너지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며 "주루 뿐만 아니라 클럽하우스, 더그아웃에서도 분위기 메이킹을 잘 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좋은 임펙트를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베이스러닝은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더블플레이로 끝날 수 있는 이닝에서 점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며 "선수들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5일 인천 SSG전까지 딱 100타석을 소화한 페레즈의 성적표는 타율 2할6푼(100타수 26안타), 3홈런 19타점, 출루율 0.306, 장타율 0.410. 완벽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라이온 힐리의 대체 선수로 후반기에 합류한 점이나 실전 공백에서 막 회복하는 시점, 팀에 끼친 영향력 등을 볼 때는 긍정적 미래도 그려볼 만하다. 리빌딩 조각을 맞춰가는 한화에서 페레즈가 앞으로도 이런 긍정적 영향력을 이어간다면, 독수리군단의 비상도 좀 더 빨라질 지 모를 일이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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