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배우 박희순(55)이 버킷리스트였던 박찬욱 감독와 작업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가졌다.
스릴러 범죄 블랙 코미디 영화 '어쩔수가없다'(박찬욱 감독, 모호필름 제작)에서 만수(이병헌)의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인 문 제지의 반장 최선출을 연기한 박희순. 그가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스포츠조선과 만나 '어쩔수가없다'의 출연 계기부터 작품을 향한 애정을 털어놨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작가의 1997년 발표작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제지 전문가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앞서 지난달 열린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진출해 월드 프리미어로 전 세계 최초 공개됐고 이후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그리고 지난 17일 개막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화제성을 입증, 드디어 지난 24일 국내 개봉해 첫날 33만1518명을 동원하며 흥행 1위에 오르며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이는 박찬욱 감독 영화 중 역대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 수치다.
이러한 추석 극장 기대작으로 등극한 '어쩔수가없다'에서 박희순은 제지 업계에 구조조정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여전히 잘나가는 회사 문 제지의 반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출로 변신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선출은 절박한 심정으로 이력서를 들고 문 제지를 찾은 만수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수에게 연민을 느끼는 인물을 연기했다.
이날 박희순은 "박찬욱 감독은 내 오랜 숙원이었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어머니와 아내(박예진)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감독이란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매번 기도 목록에 '우리 아들, 남편이 박찬욱 감독과 작업하게 해달라'며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수가없다' 제안을 받고 어머니와 아내가 기도가 통했다며 자신의 일인 듯 너무 기뻐했다. 아내도 시사회에 와서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 사실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걱정을 정말 많이 했다. 다른 배우들이 너무 잘해서 혹여 내가 민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내가 잘했다며 '엄살 그만 피워'라며 용기를 주더라. 그런 응원의 말을 들으면 의지가 많이 된다"며 "오래 전 연극할 때 실험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정통적인 것도 만드는 연극단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연기를 배우면서 작업하다 보니 그런 류의 작업에 익숙해져 있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봤을 때 내가 극단에서 했던 것처럼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 같더라. 박찬욱 감독의 예술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고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 '어쩔수가없다'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봤을 때 굉장히 의외였다. 보통 감독들은 기존의 내 이미지에서 새로운 걸 뽑아내려고 하는데 박찬욱 감독은 정말 내 이미지와 상관 없는 정말 새로운 캐릭터였고 내가 보여주지 않았던 면을 처음부터 보여주려고 하더라. 너무 신선했고 의외여서 기분이 좋았다. 흔히 말에 나의 다른 쪽을 써 먹는 것 같아 좋았다"며 "내가 연기한 선출의 촬영은 대부분 릴스 촬영 아니면 죄다 술자리 장면이었다. 나는 릴스 촬영과 술자리 장면에 목숨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에서의 연기는 가장 쉬운 연기이면서 가장 어려운 연기였다. 술은 누구나 먹고 흉내내기 너무 쉽지 않나? 때론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걸 넘나드는 연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 부담스럽고 계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찬욱 감독이 요구한 지점도 선출의 모습이 편차가 컸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이 역할을 다이나믹 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있었고 그걸 완벽히 소화해 내고 싶었다"고 의지를 전했다.
동갑내기 동료인 이병헌과 호흡도 특별했다. 박희순은 "또한 이 시나리오는 여백이 많았다. 배우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어떤 배우들은 박찬욱 감독에게 물어보며 힌트를 얻기도 하는데 나는 나의 상상력과 감독의 상상력이 어느 지점에서 맞닿는지 부딪히고 싶었다. 이러한 나 때문에 이병헌이 애먼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에 있는 표현이 아닌 생각지 못한 반응이 연기할 때 나와서 이병헌이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병헌이 좋은 배우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 이유는 상대가 어떤 돌발 상황을 연기 해도 자연스럽게 대처하더라. 이병헌의 모습을 보면서 베테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 이병헌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됐다"고 추켜세웠다.
더불어 "손예진은 어릴 때부터 봤던 배우다. 국민 첫사랑이었지 않나? 그럼에도 연기를 너무 잘한다. 이번 작품에서 손예진의 연기를 봤을 때 정말 완전 내려놨는데 또 자신이 가져가야 할 부분에서 확실하게 가져가는, 응축된 연기를 봤다. 발산하지 않아도 그 배우가 있는 자체로 납득이 되는 연기를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중 하나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성민 형은 내가 연극할 때 만난 형이다. 그 이후 20년 넘게 만나지 못한 배우였는데, 그동안 이 형의 연기력은 내가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가 됐다. 이 작품에서 범모가 어떻게 연기할까 궁금증이 컸는데, 일단 머리 스타일부터 웃기더라. 처음부터 무장해제가 됐고 성민이 형의 연기가 정말 압권이었다. '고추잠자리' OST가 나오는 신에서 성민이 형은 나의 웃음벨이었고 눈물샘을 건드리는 코드였다. 굉장히 놀라웠다. 염혜란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배우 중 하나다. 지금 가장 핫한 배우이고 대세배우다. 대본 처음 받았을 때부터 아라 역할이 가장 궁금했다. 대본 자체도 가장 튀는 역할이었고 매력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누가 맡을까 궁금했던 찰나 염혜란이 한다고 하더라. '이건 끝났다'라며 인정했다. 역시 영화를 보니 끝내버리더라. 두 말 할 필요가 없다"고 감탄했다.
박희순은 영화 속 선출의 충격적인 엔딩신에 대한 비하인드도 털어놨다. 그는 "처음에는 힘든 장면이어도 내가 다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과 제작진이 위험할 수 있다며 나와 똑같은 더미를 만들고 혹시 모를 안전장치도 설치했다. 처음엔 더미로 촬영을 진행했는데 당연히 박찬욱 감독이 만족할 리가 있겠나? '너무 티 나는데? 박희순 다시 와야 할 것 같아'라며 나를 소환했다. 결국 내가 다시 투입돼 전부 찍게 됐다. 입에 깔때기를 넣는 장면은 아무래도 위험 수위가 높아서 더미로 대체해 촬영했고 그 밖의 장면은 직접 실제로 연기했다. 땅을 파서 목만 내밀고 있었는데, 그 안에 안전장치를 다 해놨지만 그래도 힘들긴 힘들더라. 발가 벗겨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는데 녹록하지 않았다. 시사회 때 성민이 형이 이번에 발가 벗겨져서 다음엔 내가 발가 벗겨지겠다 자신했는데 옆에서 박찬욱 감독이 조용하게 '누가 보고 싶다고'라며 투덜거리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알코올 냄새가 스크린까지 뚫고 나올 정도로 리얼했던 만취 분장에 대해서도 "술이 취한 것처럼 볼에 분장도 했는데 아무래도 흉내 같더라. 촬영이 들어가기 직전 30초 정도 숨을 참아 얼굴이 빨개지게 만들었다.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숨을 참았다가 촬영에 들어가곤 했다"고 고생담을 털어놨다.
실직에 대한 화두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박희순은 "나도 간혹 실직을 생각해보게 됐는데, 만약 이 일을 못하게 된다면 쿠팡 배송이라도 뛰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도 많은 무명 배우가 일이 없을 때 배송 일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 물론 나도 연극하던 어릴 때는 연극 말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라는 직업으로 성공을 하고 싶고 계속 연극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만 두면 뭘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식구도 많다. 나이도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른척 할 수가 없다. 그만큼 책임감이 더 커졌다. 상상으로도 만수와 같은 생각을 누구나 다 할 것이다. 나도 만약 이병헌이 경쟁자라면 '이병헌만 없으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이병헌 하나 없어진다고 박찬욱 감독이 나에게 일을 주겠나 싶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에게는 이병헌 외에도 송강호도 있고 박해일도 있지 않나"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어쩔수가없다'는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이 출연했고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