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박찬준 기자]손가락 두 마디의 기적이었다.
'배추보이' 이상호(31·넥센)가 올림픽 전 마지막 월드컵에서 제대로 사고를 쳤다. 그는 지난달 31일(이하 한국시각) 슬로베니아 로글라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월드컵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롤란드 피슈날러(이탈리아)를 0.24초 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상호의 월드컵 통산 네 번째 우승이다. 이상호가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은 2024년 3월 이후 약 1년 10개월 만이다.
기분 좋은 우승이다. 그는 올 시즌 꾸준히 8강 이내에 이름을 올렸지만, 좀처럼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달 25일 오스트리아의 지몬회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4위를 차지하며 흐름을 탄 이상호는 곧바로 치른 이번 월드컵에서 금메달까지 거머쥐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극적인 승부였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차이가 갈렸다. 상대 피슈날러는 이번 대회 전까지 올 시즌 3번의 우승, 1번의 준우승을 차지한 '랭킹 1위'의 최강자였다. 피슈날러는 이번 올림픽서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다. 예선 순위도 이상호가 2위, 피슈날러가 1위였다. 첫 번째 측정 구간에서 이상호는 피슈날러에 0.16초 뒤졌다. 두 번째 구간에선 0.14초 빨랐지만, 피니시 라인 직전 다시 비슷해졌다.
결국 사진 판독으로 최종 순위가 가려졌다. 이상호의 손이 최종 라인을 먼저 통과하며, 정상에 섰다. 스노보드 평행대회에서 먼저 들어오는 것의 기준은 보드가 아니고, 지상으로부터 15cm 지점을 통과하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기준이다. 이상호는 우승이 확정되자 두 손을 번쩍 들어 기뻐했다. 그는 경기 후 "피슈날러가 강한 선수여서 긴장을 많이 했고, 100% 이상의 힘을 발휘하려 노력했다"며 "멋진 레이스를 만들어 준 피슈날러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상호는 한국 설상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가 가는 길이 곧 역사였다.이상호는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 참가, 평행대회전과 회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스노보드 최초의 동계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기세를 탄 이상호는 한국 설상 종목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8년 전인 2018년 평창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 출신으로 눈 덮인 고랭지 배추밭에서 스노보드를 배운 이상호가 세계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슬로베니아의 얀 코시르를 상대로 0.01초 차 대역전극을 펼친 4강전은 여전히 회자되는 명승부다. 대회 후 그가 경기를 치른 휘닉스 파크 슬로프는 '이상호 슬로프'로 이름이 바뀌었다.
2021년 12월 러시아 반노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한국 스노보드 역사상 첫 월드컵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비록 4강 진입에 실패하며 2022년 베이징 대회에서 아쉽게 메달을 놓쳤지만, 그해 스노보드 월드컵서 한국인 최초로 종합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다. 이상호는 이후 꾸준히 국제대회에서 10위권 내 성적을 유지하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지난해 초 왼 손목 골절로 고생했지만, 흔들리는 순간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좌우명을 되뇌며 초심을 다잡았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더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상호는 평창 대회 당시 직전 열린 월드컵에서 7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메달을 거머쥐었는데, 흐름은 그때보다 좋다. 특히 갈수록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고무적이다. 빙상 종목이 예년만 못한 지금 대한민국의 희망은 스노보드다. 이상호는 이번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남자 주장으로 선정됐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이야기다.
이상호의 경기는 대회 초반인 8일 열린다. 당일 예선과 결선을 모두 치르는데, 여기서 대한민국 첫 메달이 나올 공산이 크다. 이상호는 자신의 SNS를 통해 '항상 과정보다는 결과로,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보답하고 싶었다. 매번 아쉬움이 남았지만, 드디어 올림픽을 앞두고 좋은 성적으로 그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며 '이제 올림픽을 위한 준비는 완벽히 끝났으니 이 기세를 이어가 본 무대에서도 후회 없는 모습 보여드리고 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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