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투수와 특정 타자 사이에 '천적' 관계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이승엽은 구대성에게 상당히 약했다. 이승엽은 구대성을 상대로 통산 51타수 6안타, 타율 1할1푼8리를 기록했다. 홈런은 1개 밖에 치지 못했고, 1997년에만 5안타를 쳤으니 구대성이 두려울 법도 했다. 구대성이 2001년 해외로 진출하면서 두 선수는 더 이상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도 이승엽은 "투구폼이 공을 숨기고 나오기 때문에 공략이 어렵다. 처음부터 자신감을 잃은 것 같다"며 고개를 젓는다.
왼손과 왼손의 관계라면 투수가 절대 유리하다는게 정설이다. 이승엽-구대성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는 이를 뒤집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롯데 자이언츠 왼손 투수 브룩스 레일리(28)와 NC 다이노스 왼손 거포 에릭 테임즈(30)다. 레일리는 지난해 11승9패, 평균자책점 3.91을 기록하며 KBO 데뷔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NC를 상대로도 7경기에 등판해 3승3패, 평균자책점 3.83으로 전반적으로 호투했다. 그런데 테임즈를 상대로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테임즈는 레일리와 25번 맞붙어 타율 5할2푼4리(21타수 11안타)에 2홈런을 때렸다. 볼넷 3개와 사구 1개도 얻어냈다. 지난 시즌 테임즈를 10번 이상 상대한 투수중 피안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는 한화 이글스 배영수로 10타석에서 8타수 5안타 2홈런을 휘둘렀다. 그런데 배영수는 오른손 투수다. 테임즈가 지난 시즌 우투수 상대 3할6푼8리, 좌투수 상대 4할의 타율을 기록했음을 감안하더라도 레일리와의 성적은 '특별'했다.
레일리가 올시즌에도 테임즈와의 대결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면 롯데는 NC를 극복하기 힘들다. 롯데는 NC를 넘지 않고서는 가을 야구를 꿈꿀 수 없다. 레일리는 왜 테임즈에 약했을까. 레일리는 키 1m90의 장신에 체중 84㎏으로 다소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근육질의 테임즈를 상대하기에는 외형적 이미지는 강해 보이지 않는다. '기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었다. 실제 레일리는 테임즈를 처음 만난 지난해 4월 14일 부산 경기에서 2타수 2안타 1볼넷을 허용했다.
그러나 투수와 타자는 어디까지나 구종과 볼카운트, 심리 싸움이다. 레일리는 직구 구속이 평균 140㎞대 중반에 슬라이더, 커브, 투심, 체인지업 등 변화구도 다양하게 던진다. 빠른 공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정교한 컨트롤과 볼배합을 앞세워 완급조절로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로 분석된다. 굳이 비슷한 스타일을 찾자면 2011~2013년 LG 트윈스에서 던졌던 왼손 장신(1m95) 주키치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와 비교해도 릴리스포인트가 밀리지 않는다. 테임즈가 왼손 투수의 바깥쪽으로 대각선을 그으며 파고드는 공에 약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레일리가 바깥쪽으로 효과적으로 던진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무엇보다 테임즈와 만날 때마다 안타를 내주기 때문에 맞대결을 할수록 밀린다는 부담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결국 올시즌 상대할 때는 심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게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테임즈는 이제 분석됐다고 해서 공략당할 타자가 절대 아니다. KBO리그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타격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고 봐야 한다. 레일리가 첫 대결부터 자신감을 갖고 공을 던질 필요가 있다.
한편, 조쉬 린드블럼과 함께 지난 1일 미국 애리조나주 캠프에 합류한 레일리는 3차례 불펜피칭을 소화했고, 2차 전훈지인 일본 가고시마에서 연습경기 등판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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