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지난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은 이정수(28·고양시청)를 위한 독무대였다. 이정수는 쇼트트랙 남자 1000m와 1500m를 잇달아 제패하며 2관왕에 올랐다. 계주 5000m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바야흐로 이정수의 시대가 열리는 듯 했다. 이정수는 "그 당시엔 꽃길만 걸을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했다. 이정수는 그 해 5월 '짬짜미 논란'에 휘말렸다. 대표선발전 당시 동료선수 곽윤기와 공모해 선발을 도왔다는 의혹이었다. "왜 그런 일이 나에게 닥쳤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대 그런 사실은 없었다. 실제로 조사 결과 드러난 어떤 혐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정수는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6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당초 3년이었으나 6개월로 축소됐다. 이정수는 "선수에게 6개월은 한 시즌과도 같다. 이 기간 동안 몸도 마음도 나락으로 떨어졌다"며 "너무 힘들어서 운동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털어놨다.
힘겨웠던 그 순간, 이정수는 괴로운듯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내 눈을 뜬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이정수는 "내가 다른 욕심은 없다. 그런데 정말 놓고 싶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며 "그 동안 피땀 흘려 쌓아온 자존심과 명예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빙판을 떠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자 버텼던 몸이 탈을 일으켰다. 허리와 발목이 고장났다. 허리 통증은 극심했고, 오른발 복숭아뼈가 골절돼 땅을 제대로 디딜 수 없었다. "당시 병원에선 수술을 권유했지만 하지 않았다. 수술하면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려 공백기가 길어질 수 있었다"며 "몸이 아픈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만신창이 몸과 마음을 애써 추스리고 다시 선 빙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날갯짓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절실함은 노력으로, 노력은 결과를 낳았다. 이정수는 2013년 전국동계체육대회 1000m, 3000m,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3관왕을 차지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소치동계올림픽 출전의 꿈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소치올림픽에 나설 옥석을 가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의 탈락. 어떻게든 기회를 잡기 위해 아직 문이 닫히지 않았던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으로도 출전을 해봤지만 역시 고배를 마셨다. 이정수는 "소치올림픽을 위해 미친 듯이 준비를 했는데…"라며 뜸을 들인 뒤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선발전을 하루 앞두고 극심한 장염을 앓았다. 음식을 먹어도 모두 토해내고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별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듯 했다. "'한 물 갔다'는 말도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 힘든 일들을 겪다 보니 내성이 생겼던 것 같다"며 "내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 어느 순간 강해졌던 것 같다"고 했다. 이정수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또 버텼다.
최후의 승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라고 했던가. 좌절의 파도를 수차례 견뎌낸 이정수는 강했다. 2016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3차 대회 남자 1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이정수가 금메달을? 에이 한 번 뿐이겠지….'
이어진 월드컵 4차 대회. 이정수는 이번에도 1500m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를 향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활 찬가도 들렸다. 그러나 정작 이정수는 "아직 이르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의 눈은 일본을 향해 있다. 다음달 19일 열리는 제8회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영욕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대표팀 '맏형'이 된 이정수는 "개인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그 보다 더 원하는 것은 계주"라고 목표를 분명히 했다. 이정수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계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개인종목에선 서로 경쟁을 하지만 결국 피날레는 계주로 마무리하지 않나"라며 "모두가 웃고 함께 우뚝 서기 위해서라도 계주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고 말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도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소치의 한을 풀 수 있는 무대. 이정수는 "출전할 수만 있다면 밴쿠버의 영광을 평창에서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먼 길을 돌아와 자신 앞에 선 이정수. 그가 삿포로를 거쳐 평창에서 '겨울왕국'의 해피엔딩을 쓸 수 있을까. 시련의 과거를 뚫고 현재에 도달한 사람의 미래에는 특별한 기대감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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