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여자 플뢰레 황금세대' 오하나 여자 펜싱 대표팀 코치가 국제펜싱연맹(FIE) 부산 SK텔레콤 여자플뢰레 월드컵 현장에서 여자 펜싱의 현실과 미래, 희망을 냉정하게 짚어냈다.
5~7일 부산 스포원파크 금정실내체육관에서 진행중인 2025년 부산 SK텔레콤 여자 플뢰레 월드컵 현장, 세계 1위 리 키퍼(미국), 2위 마르티나 파바레토(이탈리아), 3위 엘레노어 하비(캐나다) 등 톱랭커 포함 총 30개국 193명의 에이스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대한민국은 심소은(세계 79위), 박지희(세계 46위·이상 서울특별시청), 모별이(세계 56위·인천광역시중구청), 김호연 (세계140위·강원특별자치도청)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포함한 34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높았다. 5~6일 진행된 개인전에서 34명 중 7명이 64강 무대를 밟았고, 박지희, 심소은 등 2명의 선수만이 32강에 살아남았다. 심소은이 32강에서 일본 톱랭커 우에노 유카(세계 5위)에게 6대15로 패하며 탈락했다. 나홀로 살아남은 박지희가 '세계 6위' 백전노장 마르티나 바티니(36)와 마주했다. 64강에서 김기연(성남시청)이 14대15, 한끗차로 패한 톱랭커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로 초반 5-0, 8-1… 10-3까지 앞서나가며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머리 하나는 더 큰 압도적 피지컬, 긴 팔다리를 지닌 도쿄올림픽 단체전 동메달리스트, '베테랑 톱랭커' 바티니가 10-8로 추격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박지희가 심플하고 과감한 공격으로 12-8까지 다시 점수 차를 벌렸으나 뒷심이 아쉬웠다. 게임수에서 한수위인 바티니가 14-14, 기어코 타이를 만들더니 끝내 마지막 한끗을 찔러내며 포효했다. 14대15, 뼈아픈 1점 차 역전패. 눈앞에서 승리를 놓친 박지희가 눈물을 훔쳤다. '여자 플뢰레 황금기'의 주역이자 팀플레이어인 오하나 대표팀 코치도 분루를 삼켰다.
플뢰레 종목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레전드' 김영호(대한체육회 이사)가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종목이자, 한국 펜싱의 자존심이다. 여자 플뢰레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남현희, 전희숙, 정길옥, 오하나가 단체전 동메달을 합작했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이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까자 단체전 5연패 위업을 이룬 펜싱코리아의 대표 종목이다. 그러나 '월클' 선배 들의 잇단 은퇴 후 급격한 위기가 찾아왔다. 여자 사브르, 여자 에페가 성공적인 세대교체와 함께 올림픽, 세계선수권에서 잇달아 메달을 딴 반면 여자 플뢰레는 부진했다. 대한펜싱협회와 SK텔레콤이 '플뢰레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2023년부터 안방' 부산 그랑프리, 월드컵 대회를 매년 유치해 어린 국내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국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제공하는 등 혼신의 지원을 하고 있지만 아직 현장의 변화는 더디다. 이날 현장엔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SK그랑프리 등 모든 대회 1열에서 한결같이 선수들을 '직관' 응원해온 최신원 대한펜싱협회장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강 이후 피스트에 한국 선수들이 없는 상황, 미국, 이탈리아, 일본 톱랭커들이 피스트를 장악했다. 최 회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선수들을 일일이 격려한 후 오하나 코치를 불러 따뜻한 메시지를 전했다.
오 코치는 "회장님께서 장난스러운 어투로 '이렇게 져버리면 어떡하냐'고 하시더니 '미국 선수들이 여자 플뢰레에서 이렇게까지 잘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정말 잘한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훈련과 다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도 LA올림픽을 향해서 미국처럼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서 "회장님께서 '할 수 있어? 없어?' 물으시기에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며 '회장님'과의 약속을 귀띔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여자 플뢰레 선배로서 안방서 메달을 놓친 아쉬움은 당연했다. 결혼 후 고민 끝에 선수촌서 후배들과 동고동락하는 국가대표 지도자를 결심한 것 역시 선배로서의 책무감이었다. "국가대표 은퇴 후 멀리서 볼 때는 그리 와닿지 않았는데 선수들과 함께 하며 직접 지도하다보니 황금기를 지낸 선배로서 후배들의 위축된 모습이 마음 아프다. 충분히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들인데 '플뢰레 안된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다 보니 선수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부분도 있다. 저도, 선수들도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지만 분명 점점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오 코치는 박지희의 한끗차 패배에 대해 "바티니는 워낙 경험이 많고 노련한 선수다. 초반 그렇게까지 앞서갈 거라고 스스로도 생각을 못했다. 승부처에서 좀더 노련하게 자신감 있게 했으면 충분히 이겼을 것같은데 어느 순간 내용보다 스코어에 집중하게 되면서 본인의 경기운영을 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가 끝이 아니다. 내년 나고야·아이치아시안게임, 2028년 LA올림픽의 목표가 있으니까, 이렇게도 져보고 저렇게도 지다 보면 이렇게도 이기고 저렇게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6위' 선수와 지희, 기연이 모두 1점차로 졌다. 오늘 경기가 이전 경기보다 분명 좋아졌다는 게 제 눈엔 보인다. 선수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부딪치고 계속 도전하면 좋겠다"고 바랐다.
오 코치는 패배를 '과정'으로 보면서도 '후배 제자'들이 좀더 독기를 품고 강하게 맞붙어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가길 희망했다. "지금 우리 선수들은 대표팀 경력이 길어야 2~3년이다. 일본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과 비슷한 나이대지만 내가 선수로 있을 때도 국제 무대에서 만났을 만큼 어릴 때부터 많은 국제 경험을 쌓았다. 우린 아시아선수권에 처음 출전한 선수들도 있고, 경험이나 멘탈 면에서도 아직 발전할 여지가 많다"고 설명했다. "우리 선수들이 매 대회 성장하는 것을 코치로서 느끼고 있지만 스포츠는 어쨌든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좀더 독기를 품고 더 강한 마음으로 승부하면 좋겠다"고 했다. "오늘 (박)지희가 아깝게 패한 후에도 그렇게 말했다. '네가 많이 늘었지만 결국은 이겨야 한다. 결국 밖으로 보여지는 건 몇 등이냐, 이겼나 졌냐뿐'이라고. 찔리더라도 도전해야 한다. 승리를 위해선 인내와 '깡다구'가 필요하다, 멘탈적으로 강해져야 하고 경험도 더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후배' 제자들과 함께 '파이팅' 기념사진을 찍은 오 코치는 "다음엔 꼭 메달을 목에 걸고 인터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개인전 결승은 공교롭게도 심소은을 꺾은 '일본 톱랭커' 우에노 유카(세계 5위)와 박지희, 김기연에게 15대14, 한끗차 승리를 거둔 '세계 6위' 마르티나 바티니의 맞대결이었다. 바티니가 우에노를 15대3으로 가볍게 꺾고 우승했다. 부산 월드컵 챔피언을 상대로 분투한 대한민국 에이스들의 '1점 차' 석패가 새삼 희망으로 떠오른 장면이었다. 부산=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