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지나 한 자리에…창덕궁 채운 '마지막 궁중 회화' 모였다(종합)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20주년 기념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 특별전
'순종의 서재' 경훈각 벽화 2점 첫 공개…'백학도' 밑그림도 주목
5∼9m 이르는 대작에 이름 남겨…"근대적 교육 받은 젊은 감각" 눈길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소나무가 늘어선 숲길 사이로 두 사람이 걷고 있다. 푸른색 옷을 입고 앞서가는 사람은 무언가 든 모습이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든 건 커다란 연잎. 그 안에는 거북이 숨어있다.
천년을 산 거북이가 연잎 위에서 논다는 옛이야기 그대로다. 뒤따르던 동자(童子)는 3천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린다는 복숭아 가지를 손에 쥐고 있다.
5m가 넘는 비단 폭을 기암괴석과 산수, 바다로 채운 화가는 왼쪽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그 뒤에 '삼가 그려 올린다'는 뜻인 '근사'(謹寫)라고 썼다.
100여년 전 창덕궁 경훈각을 채운 마지막 궁중 장식화의 모습이다.
조선 왕실의 역사·문화가 깃든 창덕궁의 벽화 6점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3곳에 나뉘어져 있던 작품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창덕궁 희정당·대조전·경훈각을 장식했던 벽화를 모은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 특별전을 연다고 13일 밝혔다.
2015년 대조전 벽화, 2017년 희정당 벽화에 이은 세 번째 벽화 전시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이날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 "2023년 복원 처리를 마친 경훈각의 벽화와 지난해 구입한 '백학도' 초본(草本·정본을 완성하기 전 그린 밑그림) 등을 한 공간에 모두 모았다"고 설명했다.
창덕궁 벽화는 화재로 잿더미가 된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1920년에 제작한 것이다.
1917년 11월 10일 당시 황위에서 물러난 순종(재위 1907∼1910) 내외가 머무르던 창덕궁 내전에 큰불이 나면서 대조전, 희정당 등 주요 건물이 불에 탔다.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1920년 재건된 건물은 전통 건축의 외양에 서양식 설비와 실내 장식을 더했고, 그 안은 대형 벽화로 장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화는 벽에 직접 그린 게 아니라 비단에 그린 뒤 종이로 배접하고 이를 벽에 부착하는 이른바 '부벽화'(付壁畵)의 형태로, 총 6명의 화가가 참여했다.
벽화 6점은 각각 높이가 180∼214㎝, 너비가 525∼882㎝에 달한다. 모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최근 보존 처리를 마쳤다.
이홍주 학예연구사는 "6점의 벽화는 궁중 회화 전통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작"이라며 "위치나 규모, 주제 등은 기존의 궁궐 장식 그림과 연결되는 듯하면서도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왕의 집무실이자 접견실로 쓰인 희정당, 내전의 중심 건물인 대조전, 순종의 서재 겸 휴식처로 쓰였던 경훈각 순으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9m에 이르는 희정당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김규진(1868∼1933)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는 금강산을 직접 유람하며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총석정절경도'는 해안가를 따라 빼곡히 솟은 돌기둥을 바다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웅장하고 화려한 외금강 일대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박물관 측은 "금강산은 궁중 회화로는 새로운 소재"라며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영험한 산이면서도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되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대조전 부분에서는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를 만날 수 있다.
오일영(1890∼1960)과 이용우(1902∼1952)가 함께 그린 봉황 그림은 왕실의 번영과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뜻을 지녔으며, 궁궐 장식 그림의 단골 소재로 여겨졌다.
두 사람은 1911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의 1기 졸업생으로, 안중식(1861∼1919) 등으로부터 전통 화법을 배웠다.
보름달이 뜬 하늘을 배경으로 학 16마리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백학도'는 김은호(1892∼1979)의 작품으로,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묘사가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은호가 그림을 구상하면서 제작한 초본도 함께 공개한다.
경훈각을 장식했던 두 벽화는 대중에 처음으로 소개돼 의미가 크다.
노수현(1899∼1978)이 그린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는 경훈각 동쪽 벽을 장식한 그림으로, 아침 해가 떠오른 신선 세계를 섬세한 필치로 화폭에 담아냈다.
서쪽 벽을 채운 이상범(1897∼1972)의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는 중국 북송 시대 문인 소식(蘇軾·1037∼1101)의 책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두 작품은 신선 세계 등의 소재를 볼 때 황제 부부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해석된다.
이홍주 연구사는 "창덕궁 벽화는 궁중 회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전에 없던 대형 화면으로 구성했으며 근대적 미술교육을 받은 젊은 화가들의 감각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평소 보기 힘든 창덕궁 벽화 실물을 모았다는 점에서 볼거리가 충분하다. 전시 2부에서는 벽화 속 금강산, 봉황과 백학 등을 생생하게 표현한 미디어아트도 선보인다.
다만, 우리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그린 벽화 너머에는 생각할 부분도 있다.
김은호·노수현·이상범 등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바 있다.
당대 최고 화가로 꼽히며 우리 전통 회화의 맥을 잇고자 노력했던 이들의 훗날 활동, 1920년대 이후 시대적 상황과 역사 등은 여러 질문거리를 던진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
yes@yna.co.kr
<연합뉴스>
2025-08-13 16:03:55